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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월)

'왕의 길' 위에 선 대통령, 권력에 취하게 만드는 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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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2024년 국군의날에 광화문에서 벌어진 이 괴상한 퍼포먼스의 본질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서울의 핵심부에 있는 광화문 광장이 갖는 상징성은 복합적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으로 복원한 광화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경복궁 동쪽 건춘문으로 이전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래서 해방 후 박정희는 일제 극복의 상징으로 광화문 앞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을 끝낸 4.19 혁명과 군사독재를 끝낸 1987년 민주화운동, 그리고 2016년 박근혜 탄핵 등, 전쟁 이후 광화문 광장은 대체적으로 대한민국 민주화를 상징했던 곳으로서 집단 경험을 공유한 공간으로 자리했다.

그 광화문 광장을 윤석열 대통령이 '전유'(專有)해 버렸다. 다중의 소유물인 광장의 상징을 제 멋대로 가져다가 의미를 독점함으로서 다중을 농락하고 있는 셈이다. 2024년 국군의날 행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그 광화문 광장을 74년 전 6.25전쟁터의 특설 무대로 만든 후 스스로 배우가 되어 단상에 난입했다. 국군의날 행사를 여러 차례 봐 왔고 또 직접 취재도 해 본 적이 있지만, 이런 기괴한 심성을 불러일으킨 행사는 처음 보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사 퍼레이드는 희귀한 일이다. 최소한 민주화된 국가에선 군사 퍼레이드를 하더라도, 정부 수반은 군인들과 최신형 무기를 사열하는 수준에서 정제된 행동과 말투로 안민보국을 말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엔 모르겠으나, 한국도 민주화 이후엔 국군의날 행사를 축소해 왔고, 남북 관계 상황 등을 정무적으로 판단해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 수위를 적절히 조율해 왔던 게 사실이다.

'21세기에 웬 군사 퍼레이드냐'는 말이 나올 때마다 윤석열 정부가 단골로 예를 드는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프랑스는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 대규모 열병식을 진행하긴 하나, 행사의 의미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중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혁명을 통해 왕의 군대를 없애고 '공화국 군대'를 발명해 낸 프랑스의 군사 퍼레이드는 시민군(국민군)이 권력자(왕)를 끌어내렸던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다. 윤석열 정부가 세수 부족 와중에 수십억 씩 들여 벌이고 있는 군사 퍼레이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윤석열 정부는 왜 이런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를 기획했을까. 근육질 무기를 과시하던 그 날을 전후로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북한의 '쓰레기 풍선'을 경고하는 긴급 문자들이다. 북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쓰레기 풍선'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와중에 벌이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이번 국군의날 행사에서는 총선 참패와 지지율 붕괴로 정치적 궁지에 몰린 대통령의 콤플렉스가 어른거린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국군의날을 계기로 뜬금없는 호전성을 드러낸 건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도 있었다.

박근혜는 2016년 10월 1일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북한 군인·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이라며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박 전 대통령이 국군의날을 정치적으로 전유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래도 최소한 박근혜는 연병장에 뛰어들어 스스로 군인 행세를 하진 않았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지난 1일의 국군의날 행사는 '박근혜 시절'을 귀여운 수준으로 만들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국군의 날 서울 도심 시가 행진이 열렸다. 이날 하루 쓴 돈만 79억 원이다. 3000명 이상의 장병이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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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 관람 무대에서 건군 76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지켜보던 중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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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권은 윤석열 대통령이 행사 한복판에 갑자기 뛰어든 모습이었다. 용산이라는 밀실에서 나와, 광화문이라는 광장으로 나선 대통령은 항공 선글라스를 끼고 충암고 후배인 국방부장관을 옆에 대동한 채 조선시대 궁궐 앞에 설치된 '월대'를 향해 경복궁 방향으로 걸어갔다.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 월대의 한 가운데에는 어도(御道), 즉 왕의 길이 있다. 조선시대 왕이 백성과 소통했던 시설물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윤 대통령이 '왕의 길'에 도착하자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하늘을 갈랐고, 대형 태극기가 풍선에 매달려 솟아 올랐다. 이 대통령의 퍼포먼스가 1950년 서울 수복 때 해병대가 게양한 태극기의 의미를 담았다는 설명을 들었을 땐 뜨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수복은 1950년 9월 28일에 있었다. 원래 서울시와 해병대는 매년 서울 수복일인 9월 28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서울 광장에서 열어왔다. 국군의날 행사 3일 전인 지난달 28일에도 해병대 사령부와 서울시가 함께 74주년 서울 수복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시청 건물에 대형 태극기를 거는 장면을 재현했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김상한 서울시행정1부시장이 참석한 조촐한 행사였다. 해병대원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키맨인 김계환 사령관은 자신의 부대원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여전히 별일 없이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국군의날 행사에 서울 수복 기념 행사를 또 끼워 넣은 것은 대체 왜일까. 원래 국군의날은 38선을 돌파한 날(10월 1일)을 기념한다. 굳이 며칠 전 했던 '서울 수복 행사'를 3일이나 지난 후 대통령을 주연으로 내세워 또 벌여야 할 큰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군미필 대통령을 '전쟁 영웅'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국군의날에 직접 배우가 되어 무대에 선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피땀이 서린 광화문 광장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하나로 수렴해버렸다. 국군들이 주인공이 돼야 할 국군의날의 주인공은 대통령이었고, 대통령은 '왕의 길'을 걸어 광화문 광장의 의미를 북한군을 몰아낸 1950년 '서울 수복'의 시대로 돌려 놓았다.

해병대원들이 광화문 자리의 중앙청사(옛 조선총독부 건물) 앞 계양대에 태극기를 올리는 모습은 1954년 재현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 자리를 윤 대통령이 꿰찬 것이다. 해병대 업적인 서울 수복 행사를 해병대원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군사력을 과시하고 국군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것까진 이해하겠지만, 그 장소가 대한민국의 다양한 역사가 어우러져 있는 광화문 광장이라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아우르며, 전쟁과 평화, 민주주의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담아낸 광화문 광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선보인 섬뜩하고 기괴하면서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이 퍼포먼스는 광장의 의미를 '전쟁터'로 축소시켰고, 그 곳에서 '왕의 길'을 걸어 서울 수복 퍼포먼스를 벌인 군미필 대통령은 광장의 의미를 멋대로 전유해버렸다.

국군의날에 '왕의 길' 위에 선 대통령을 연출한 게 누군지 모르겠으나, 대통령을 권력에 취하게 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일 것이다. 대통령은 그를 멀리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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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 중 세종대왕상 앞 관람 무대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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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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