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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세상 읽기]정부는 ‘벼멸구 피해’ 안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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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딸에게 ‘벼멸구’를 아는지 물으니 의외로 알고 있었다. 근래 언론에서 벼멸구 피해 소식을 그나마(!) 다루고 있어서 들어본 것이냐 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 출연자였던 방송인 박명수의 별명이 벼멸구였기 때문이란다. 나는 당연히 알고 자랐다. 1975년 벼멸구로 큰 피해가 났고, 이후 1978년, 1983년, 1987년, 1990년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병해충은 식량계획에 영향을 주는 국가적 문제로 인식해 전 언론사에서 비중있게 다뤄 도시내기들도 벼멸구나 ‘이화명충’ ‘물바구미’ 정도는 알고 살았다.

이제 벼멸구는 예능프로그램에서나 듣는 말이 됐지만 꾸준히 쌀농사를 괴롭혀왔고 주요 방제대상이다. 벼멸구는 벼의 밑동에 붙어 수액을 빨아먹어 볏단을 말려 죽인다. 겨우 건진 쌀도 벼멸구 입을 타면 쭉정이가 돼 양도 맛도 떨어진다. 2020년에도 벼멸구 피해가 꽤 컸으나 쌀농사 그만 지으라는 압박이 넘쳐나는 때에 벼멸구 소식 따위야 동네소식으로 며칠 돌다 말았다. 하지만 이번 벼멸구 피해는 그 양상과 규모에 있어서 ‘역대급’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남부지역을 거점으로 피해 규모가 2만㏊를 넘고 강원도 강릉 일부도 피해를 입었다. 전체 논면적 75만㏊의 3%를 넘나드는 비율이다. 임실군의 경우 논의 70% 이상이 벼멸구로 초토화된 상태로 농민은 물론 지역이 받는 충격이 크다. 이미 벼멸구가 들이닥친 충남의 농민들이 덜 여문 나락을 급히 베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며칠만 더 버티면 알곡이 들어차건만 벼멸구가 사람 형편 따위 봐주질 않으니 밤낮없이 콤바인이 돌고 있다. 아무리 헐값이어도 쌀이라도 건져야 그 돈으로 빚을 내 다시 농사도 짓고 시장에 나가 풀빵이라도 사 먹는다. 그래야 지역상권이 유지가 되고 지역소멸을 조금이라도 늦춘다.

비래(飛來) 해충인 벼멸구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베트남에서 중국 남부로, 한반도로 들어온다. 유사 이래 논농사에 있어 벼멸구의 경로는 그랬다. 마치 중국이 원인을 제공한 듯 사안을 몰아가는 것도 대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해 벼멸구 창궐 원인은 수확기까지 이어진 폭염이며 향후 이런 기후 문제는 반복될 터인데 그때마다 바람 탓을 할 것인가. 농민과 공무원, 농협 임직원까지 나서서 방제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원형 탈모가 나타난 듯 논 여기저기가 뚫리고 벼가 엎어졌다. 드론을 띄울 줄 아는 청년 농민들이 노인들 논부터 방제를 했지만 속수무책이다. 저 작은 벼멸구가 사람을 끝내 이겨먹었다. 전남도의회 박형대 의원은 공무원의 과로사가 우려될 정도로 ‘사람이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며 이것은 재난이자 재해라 일갈했다.

벼멸구 피해 현장에 농식품부 장관이 내려와 피해를 본 쌀을 수매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손을 털려 하지만 얼마에 수매해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 그 말 믿고 섣불리 벼를 베면 피해조사가 제대로 되려나 걱정스러워 벼멸구 잔뜩 붙은 벼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하여 ‘벼멸구 피해의 재해 인정’과 ‘피해 지역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농민들만이 아니라 시장, 군수, 도지사 심지어 지역농협에서마저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병해충으로 인한 재해인정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인가, 천덕꾸러기 쌀, 이참에 쌀농사를 접었으면 하는 속내인가. 와중에 쌀 생산 총량에는 문제없노라는 정부의 발언은 피해 입은 농민들의 마음을 찌르는 동시에 농민들을 갈라치는 나쁜 말이다.

재해란 인력으론 막기 힘든 불가항력이다. 가혹해지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최소한 방책이 재해인정이다. 그래야 최소한의 영농의지를 갖고 내년 모내기를 할 수 있다. 올해는 남부지역에 벼멸구가 창궐했지만 내년엔 어느 들판에 구멍을 낼지 알 수 없다. 기후위기 시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최소한의 영농의지다. 그래야 생산자도 소비자도 먹고산다.

경향신문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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