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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단독] 화이트칼라만 관대…금융사기 양형기준 단 79%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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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5월 서울고등법원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기업 총수 A씨에 대법원 양형기준상 최소 형량인 징역 3년보다 1년 적은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회사 중장기 공급계약을 공시하기 전 차명 계좌로 주식을 산 뒤 되팔아 11억원 시세차익을 올린 혐의는 인정했다. 하지만 “기업을 이끌며 국가 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며 “권고형 내에서 선고하는 것은 다소 가혹하므로 그 하한을 이탈해 형을 정한다”고 했다.

#2. 2022년 9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은 사기 혐의 재판에서 양형기준상 하한인 징역 2년보다 낮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무역회사 대표인 B씨가 2016년부터 2년간 피해자 9명에게 “몽골 사업에 투자하면 10% 수익이 난다”고 속여 5억여원의 투자금을 편취한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투자금 반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는 이유로 하한선보다 낮은 형량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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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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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양형이 금융사기·뇌물·선거 등 이른바 기업인·공직자·변호사·정치인 범죄에 유독 관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고무줄 판결’ 논란으로 2007년 도입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권고한 양형기준조차 어기면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 양형위로부터 받은 ‘2016~2022년 양형기준 준수 현황’에 따르면 전체 44개 범죄의 양형기준 준수율은 이 기간 89.9%~92.2%로 높은 편이었다. 2022년 11월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이 해외 법관이 모인 국제 콘퍼런스에서 “한국의 양형기준 준수율은 90%를 상회한다”고 자랑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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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기자



하지만 범죄 유형별로 2022년 전체 평균은 92.1%(미준수율 7.9%)였는데, 증권·금융(78.9%), 배임수증재(84.4%), 지식재산·기술침해(84.5%), 공문서(84.3%), 변호사법 위반(86.4%), 뇌물(86.5%), 사기(87.6%), 선거(89.8%) 등 범죄는 미준수율이 두 자릿수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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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정한 증권 ·금융범죄 양형 기준. 사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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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폭력(99.2%), 도주·범죄은닉(98.9%), 손괴(97.8%), 교통(97.5%), 공갈(97.2%), 사문서(97.1%) 등 일반인 범죄는 철저히 양형기준을 지킨 것과 대조된다. 공문서와 사문서 위변조 등 범죄는 법정형부터 공문서 범죄를 엄히 처벌하도록 하는 데 양형기준 준수율은 사문서보다 12.8%포인트 낮았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공문서 위변조는 범행 주체가 공무원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2022년 한 해만이 아니다. 평균 준수율이 90.8%인 2016년에도 증권·금융(69.2%), 배임수증재(78.3%), 지식재산·기술침해(82.7%), 공문서(84.7%), 변호사법 위반(59.5%), 뇌물(73.2%), 사기(85.4%), 선거(88.3%)는 평균을 밑돌았다.

특히 2016년 변호사법 위반 준수율(59.5%)은 7년간 조사한 모든 범죄 중 가장 낮았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동종 업계라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물론 현행 양형기준은 권고적 효력만 갖기 때문에 판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판사들이 양형기준을 벗어날 때는 판결문에 이유를 기재해야 하는 등 합리적인 사유 없이 양형기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또 양형의 균등성과 적정성을 높이고 불공정 양형을 줄여 사법 신뢰를 증진하겠다는 제도 도입 취지와도 어긋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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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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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판사들이 대법원에서 정한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것은 문제”라며 “흔히 ‘잡범’이라 불리는 범죄에만 기준을 칼같이 지키고, 화이트칼라 범죄엔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면 ‘법 앞의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영교 의원은 “판사들이 특정 범죄 유형에만 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하면 자칫 ‘무전유죄 유전무죄’ 관행처럼 비칠 수 있다”며 “범죄별로 준수율이 다른 양형기준 형평성을 맞추지 않고선 사법 불신을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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