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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韓 전력 인프라 ‘슈퍼 사이클’, ‘행복한 비명’ 언제까지 [스페셜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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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기기 강세, 시작에 불과’ ‘슈퍼 사이클 장기화’ ‘아직 반도 안 왔다’….

국내 전력 인프라 업체를 분석한 증권가 보고서 제목은 온통 호평 일색이다.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기업마다 비상경영에 돌입했지만 전력 인프라 업체는 예외다. 인공지능(AI) 시장이 커지고 데이터센터 관련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력기기, 전선 업체마다 수주 물량이 넘쳐나는 모습이다. 덩달아 매 분기 실적이 날개를 달면서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매경이코노미

전력기기 ‘빅3’ 수주 영업이익 급증

2분기 합산 이익 4000억원 육박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전력기기 3사의 올 2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382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 증가했다.

이 중 가장 눈부신 실적을 낸 곳은 HD현대일렉트릭이다. 2분기 매출 9169억원, 영업이익은 21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3%, 257%가량 증가했다. 단일 분기 기준 최대 실적이다.

LS일렉트릭 역시 분기 기준 최대치인 1096억원 영업이익을 냈다. 북미 수주가 급증하면서 해외 사업 비중이 50%를 넘어 실적 상승세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효성중공업도 전력기기 사업을 하는 중공업 부문 영업이익이 650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어느새 8%를 넘어섰다.

이들 업체는 앞서 지난해에도 70% 넘는 영업이익 증가율(HD현대일렉트릭 137%, 효성중공업 80%, LS일렉트릭 73%)을 보이면서 실적이 날개를 달았는데, 올 들어서도 호황의 기운이 꺾일 기미가 없다.

향후 전망도 밝다. 전력기기 업체마다 길게는 5년 치 넉넉한 일감을 확보한 덕분이다. 올 2분기 기준 전력기기 3사 수주잔고는 16조2000억원에 달한다. HD현대일렉트릭 누적 수주가 6조8276억원으로 가장 많고, 효성중공업과 LS일렉트릭 수주잔고도 각각 6조6000억원, 2조8000억원에 달한다.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수주 목표치를 37억4300만달러(약 4조9000억원)로 제시했다. 지난해 목표치(19억4800만달러)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HD현대일렉트릭 주력 제품은 중대형 변압기다. 대규모 발전소나 원거리 송전에 사용되는 중대형 변압기는 전력 공사 현장에 맞춰 주문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대량 생산이 어렵다. 수요가 늘어나면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빠르게 올라 몸값이 높아진다.

북미를 넘어 수주 국가도 점차 다변화되는 모습이다. 지난 8월에는 유럽 최대 전력 수출국인 스웨덴 전력회사와 415㎸급 초고압 변압기 5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2029년까지 순차적으로 인도할 계획이다. HD현대일렉트릭 관계자는 “이번 수주는 기술적 진입장벽이 높은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유럽 최대 전력 수출국에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LS일렉트릭은 베트남을 비롯한 아세안 시장에 주목한다. LS일렉트릭은 최근 베트남 남부 산업 도시 빈즈엉성에서 개최된 ‘2024 일렉트릭 에너지쇼’에 참가해 신재생에너지 발전에 최적화된 직류(DC)·교류(AC) 전력 시스템 기반 스마트배전 솔루션을 전면에 배치했다. 현지 고객 맞춤형 차세대 에너지저장장치(ESS) 플랫폼도 앞세웠다. 전력 변환 핵심 기술과 모터 제어를 통해 에너지 사용량을 절감시키는 고효율 솔루션이다.

LS가 아세안 시장에 주목하는 것은 미국 빅테크 기업 데이터센터 투자가 쏟아지면서 아세안 지역 전력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는 덕분이다. 구글은 말레이시아에 데이터센터·클라우드시설을 건립하는 데 20억달러(약 2조7000억원)를 투입할 예정이다. 아마존도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총 110억달러(약 14조7000억원)를 쏟아붓는다. 효성중공업은 최근 모잠비크 국영 전력회사 EDM과 428억원의 전력망 강화 사업을 체결하는 등 아프리카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전력기기 업체 생산공장도 밤낮없이 돌아간다. 올 1분기 기준 생산공장 가동률을 보면 HD현대일렉트릭(94.8%), 효성중공업(86.5%), LS일렉트릭(95.6%) 등 ‘빅3’ 업체 모두 한계치에 근접했다.

올 하반기에도 전력기기 업체마다 호실적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금융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의 3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167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6.4% 증가할 전망이다. 같은 기간 LS일렉트릭 영업이익도 87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4%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전력기기뿐 아니라 전선 업체도 호황을 맞았다. LS전선은 역대 최초로 연간 기준 7조원 매출을 눈앞에 뒀다. 올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 늘어난 3조3647억원에 달했고 하반기에도 호황이 이어지면 무난하게 7조원 고지를 돌파할 전망이다. 대한전선은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한 1조6529억원 매출을 올려 연매출 3조원 달성을 바라본다. 전선업계 ‘빅2’ 매출만 합해도 연간 10조원을 넘어선다.

매경이코노미

국내 전력기기 업체 수주가 급증하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사진은 울산 HD현대일렉트릭 변압기 공장(위)과 충북 청주 LS일렉트릭 스마트공장.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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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인프라 기업 호황, 왜?

AI 열풍에 북미 노후 전력망 교체 호재

전력 인프라 업체가 호황을 누리는 배경은 뭘까. 크게 보면 AI 열풍과 노후 전력망 교체, 친환경 키워드로 요약된다.

첫째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열풍으로 글로벌 시장 데이터센터 건립이 잇따른 점이 호재로 작용했다. AI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이 필수다. AI 연산을 위한 반도체 칩이 많은 전력을 쓰는 만큼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 대비 20배 이상 높은 변압기 용량이 필요하다. 이처럼 AI 활용기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만큼 초고압 변압기, 배전반 등 전력 인프라, 시스템 수요가 급증하는 모습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AI 발전의 제약은 변압기 공급(voltage transformer supply)과 전력 확보다. 현재 전력망은 AI 기술 발전에 따른 증가한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2022년 460테라와트시(TWh)에서 오는 2026년 최대 1050TWh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23~2028년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연평균 전력 수요 증가율이 11% 수준이지만, 여기에 AI 서버를 적용하면 26~36%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둘째 북미 시장에서 노후 전력망 교체 주기가 도래한 점도 변수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미국에 설치된 변압기의 70%가량은 25~30여년 전에 설치돼 교체 시점이 다가왔다. 통상 변압기는 25년이 지나면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미국 정부가 최근 고용량 전력망 설치, 시스템 현대화에 속도를 내는 이유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기업이나 가정에 보내려면 그에 맞게 전압을 바꿔주는 변압기가 필수다. KB증권에 따르면 미국의 한국산 변압기 수입 비중은 2020년 5.2%에서 올 4월 누적 기준 17.3%까지 높아졌다. 중대형 변압기와 소형 변압기 모두 한국 제품 점유율이 점차 올라가는 추세다. 특히 글로벌 기업들이 북미 시장에 대규모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면서 전력기기 몸값이 높아진 점도 변수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야심 차게 도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칩스법’으로 불리는 반도체법은 전 세계 설비 투자를 끌어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미국은 IRA를 통해 친환경에너지 생산과 자동차, 배터리 등 ‘녹색 산업’에 3690억달러(약 493조원)를 투입한다. 전기차와 배터리 관련 제조시설에는 최대 30%, 배터리·태양광·풍력 부품 생산시설에는 10%의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반도체 산업에도 총 2800억달러(약 374조원)를 투자하기로 하는 등 자국 내 산업을 키우는 중이다. 이들 법이 발효된 이후 미국 노후 전력망 교체와 함께 전력 소비량이 높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제조시설 유치에 따라 송배전 인프라 필요성이 높아졌다. 재계 관계자는 “미중 갈등 여파로 미국이 탈중국 공급망 정책을 펼치면서 중국산 변압기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대신 품질 좋은 한국산 변압기 인기가 높아지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셋째 기후 변화에 대응해 태양광, 풍력 등을 쓰는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세계 곳곳에 들어서는 것도 전력 인프라 호황 요인으로 손꼽힌다. 발전소가 문을 열 때마다 변압기 같은 전력기기를 새로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42.5%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재생에너지지침(RED)이 만들어졌다. 이 여파로 재생에너지 전력망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호황을 맞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추진 중인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중동 전력기기 수요도 폭증하고 있다.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오랜 기간 경험을 쌓아오면서 기술력을 높인 국내 전력기기 업체 주문이 쏟아진다.

블룸버그신에너지금융연구소(BNEF)에 따르면 글로벌 전력망 투자 규모는 2020년 2350억달러에서 2030년 5320억달러, 2050년 6360억달러로 증가할 전망이다. 사실상 글로벌 전력망업계가 ‘슈퍼 사이클’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북미의 노후 전력망 교체를 시작으로 유럽의 재생에너지 확대, 데이터센터와 생성형 AI 전력 수요 증가로 초고압부터 중저압 전력기기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 투자가 급증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생산 규모 늘리는 전력기기 업체

LS 초고압 전력기기 공장 증설 눈길

전력 인프라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보이자 국내 전력기기 업체는 저마다 공격적인 증설에 나섰다.

HD현대일렉트릭은 약 1200억원을 투자해 충북 청주에 중저압차단기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울산, 경기 안성에 이은 세 번째 중저압차단기 공장이다. 내년 10월 완공 목표다. 시험 가동 등을 거쳐 2030년 연 650만대 생산할 계획이다. 울산, 안성공장 물량까지 합치면 총 생산 대수는 연 1300만대로 늘어난다. 중저압차단기는 송전된 전력을 배분, 공급하는 배전기기 중 하나다. 전력 부하 시 추가 전력 유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LS일렉트릭은 초고압 전력기기 핵심 생산기지인 부산사업장 생산능력 확대를 위해 1000억원을 투자한다. 부산사업장 초고압 생산동 옆 1만3223㎡(약 4000평) 규모 유휴부지에 공장을 신축하고, 진공건조 설비(VPD) 2기를 증설해 조립장과 시험실, 용접장 등 전 생산 공정을 갖출 계획이다. 내년 9월 공장 증설 완료가 목표다.

효성중공업도 미국 멤피스와 경남 창원 초고압변압기 공장을 동시에 증설한다. 1000억원을 투자해 전체 초고압변압기 생산능력을 40% 이상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창원공장이 대규모 증설에 나선 것은 2010년 이후 14년 만이다. 우태희 효성중공업 대표는 “전력기기 슈퍼 사이클 바람에 제대로 올라타서 글로벌 시장에서 톱클래스 공급 업체로 자리 잡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생산 물량만 늘리는 게 아니라 기술력 확보에도 주력한다.

LS일렉트릭은 최근 세계 최대 전력 전시회인 ‘2024 국제 대전력망 기술회의(CIGRE)’에서 초전도 케이블 시스템과 초전도 전류제한기로 구성된 데이터센터용 초전도 솔루션을 선보였다. 초전도 솔루션은 변전소 없이도 22.9㎸의 낮은 전압으로 154㎸급 대용량 전력을 송전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이다.

효성중공업은 전자식 변성기 시장에 주목한다. 전력망 상태를 확인해 사고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변성기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이다. 전자식 변성기와 함께 실제 전력을 차단하는 장치인 고압차단기를 결합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다는 포부다. HD현대일렉트릭은 태양광, 해상풍력발전소에 특화된 친환경 변압기 기술 투자를 늘릴 계획이다. 덕분에 국내 전력 기자재 수출 증가세도 이어질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전력 기자재 수출액은 2020년 111억달러에서 2022년 138억달러, 지난해 151억달러로 급증했다. 올해는 162억달러 수출이 예상된다. 황준호 상상인증권 애널리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전기화(Electrification)’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신규 전력망 구축, 노후 변압기 교체 수요에 힘입어 전력기기 관련 시장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력 인프라 업체들이 호황을 맞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북미 시장 데이터센터가 포화 상태에 이르거나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이 주춤할 경우 변압기 수요가 둔화될 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술력에서 여전히 한 수 위로 불리는 지멘스, 히타치 등 글로벌 업체들이 생산 규모를 늘리면 자칫 ‘치킨게임’에 돌입할 우려가 크다.

“실적 피크아웃을 막으려면 공장 증설만 할 게 아니라 하루빨리 기술 차별화나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한목소리다.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도 눈여겨봐야 할 변수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전력 업체 슈퍼 사이클에 제동이 걸릴 우려도 크다. 그는 신재생에너지 투자, 전기차 확대 등 탈탄소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향후 전력 인프라 투자 규모를 줄일 수 있어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

“한국 전력기기 업체 수주가 늘지만 여전히 매출 규모나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글로벌 주요 기업과 비교하면 미흡한 수준이다. 글로벌 시장 변압기 매출 기준 점유율을 보면 일본 히타치 11%, 지멘스는 8%지만 국내 기업은 2%에도 못 미친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재생에너지 관련 전력 인프라 투자가 줄면 국내 업체 실적 상승세가 꺾일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박세영 나이스신용평가 기업평가실장 진단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8호 (2024.10.02~2024.10.0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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