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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독립군일까, 일본 경찰일까? 어린 아이의 배를 찌른 자들은 - 1924년 평안북도 위원군 학살 사건 [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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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80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설득하고 그 피해자들을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좋은 일은 남기고 싶지만 불행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여기 한 가족의 사진이 있습니다.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사진설 명◇▲오른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최흥주 ▲중앙: 총에 맞아 창자가 나온 어린아 이 최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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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이미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실만이라도 기록해, 세상에 알리고 역사에 남기고자 했던 현장 기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이 기사와 사진이 실리기 한 달 보름 전인 8월 11일 밤, 평안북도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 무장한 괴한들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여섯 집이 전멸하고, 스물 여덟 명의 가족이 한순간에 학살당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립군의 소행이라는 일제의 발표에 대해 독립군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이후에도 일제는 정확한 사건 개요와 가해자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신문사에서 무명회(일종의 공동 취재단) 소속 특파원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전시 상황 이상의 긴장이 흐르는 국경 지역의 가련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이 소식을 전한다”고 기사를 싣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기자에게 증언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기사는 ‘현장에서 일본인들이 주로 신는 버선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단서를 기사 끝부분에서 제시합니다. 판단은 하늘과 독자들이 해야할 것이라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포가 사회를 감싸고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역사 중 한 단락입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1924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동아일보

1924년 평안북도 위원군 학살 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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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진설명에 “참화를 피한 사람 = 오른편 앉은 이는 불 속에서 살아나온 최홍주. 그 곁에 누운 아이는 총창에 찔린 그의 아들 최인국, 그 밖의 사람은 간호에 진력하는 친족들”이라고 썼습니다.

우선 사건 개요를 보겠습니다. ◇ 천통지곡(天痛地哭)할 國境大慘禍 事件(국경 대참화 사건)이라는 기사인데 너무 방대한 기사라 최대한 짧고 쉽게, 그리고 지금의 언어로 요약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국경의 대참사 사건

- 벽촌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40여 명의 무장 부대가 지나가고, 마을 전체가 멸망하였다

- 치솟는 불길에 무고한 주민들이 한순간에 처참하게 죽어가다

- 6가구가 전소되었고, 28명이 불에 타 죽다

-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형체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개와 닭의 잔해뿐. 마치 백골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잿더미 속에서 매미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어렴풋이 총성까지 울리다.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한 현장, 폐허만 남아 있다

- 독립단은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경찰은 독립단의 소행이라며 책임을 미루다. 이 사건의 진실은 하늘과 독자가 판단할 것

- 끔찍한 고문과 극형. “무장 부대가 우리 집에도 찾아와서…”라고 말한 피난 중인 15세 소녀 송씨의 증언

- 창자를 끌어안고 맹렬한 불길 속에서 도망친 최씨의 이야기와 그 전후의 참혹한 광경

- 잔혹한 악마는 누구인가? 청산도 말없이 주민들이 이 끔찍한 재앙을 피해 달아나니, 하늘과 땅에 물어볼 자가 없다. 남은 마당에는 ‘지카타비’ 자국만 남았다

◇ 사건 개요: 8월 7일 오전 6시경, 그 마을에서 약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화창면 주재소를 독립단이 습격하려다 중지하고, 약 25명이 신흥동으로 올라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밥을 해 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 새벽, 일본 경찰이 마을로 들이닥쳤고, 피해를 당한 여섯 가구를 포위한 후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이 있느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실대로 말하면 멸망할 것이 두려워 자백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끔찍한 고문을 시작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9일에는 경찰이 일시에 그들을 석방하여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1일 밤, 주민들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 피해 상황:

김응채(金應彩)의 집 - 8명이 불에 타 죽었다. 김응채와 그의 아내, 세 아들, 차남의 아내, 손자 2살 된 아이 등 8명의 가족이 불에 타 사망했다.

전명길(全明吉)의 집 - 2명이 타 죽고, 전명길과 그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창섭(李昌涉)의 집 - 이창섭과 그의 아내, 아들 등 4명이 사망했다.

최응규(崔應奎)의 집 - 6명이 사망했다. 최응규와 그의 아내, 그의 부모, 아들과 장모가 사망하고, 고용인 최흥주와 그의 아들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송지항(宋芝恒)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송지항의 아내와 사위 등이 사망하고 송지항 본인과 딸만이 살아남았다.

김창성(金昌盛)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김창성과 그의 딸, 장남, 고용인 등이 사망했다. 집 여섯 채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가축과 곡식 또한 전부 타버려 물질적 피해는 수천 원에 달한다.

◇ 사건 이후: 화재가 발생한 후,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시시각각 자신들에게도 참화가 닥쳐올까 두려워했다. 주민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란을 떠나거나 산속으로 몸을 숨겼으며, 마을은 마치 유령 마을처럼 변해갔다. 남은 시신들은 부근의 공동묘지에 임시로 매장되었고, 며칠 후에야 경찰이 사건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 생존자 이야기: 최흥주는 그날 밤 자신과 가족이 끔찍한 재앙을 당했던 일을 설명했다. 무장 부대가 찾아와 가족을 결박하고 방 안에 가둔 후 불을 질렀다고 한다.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은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나오는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 현장에서 발견된 일본군의 버선

신문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장황한 기사 뒤에 또 하나의 기사를 싣습니다. 제목은 “잔학한 악마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러면서 범인에 대한 판단은 하늘과 독자에게 맡긴다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광경과 누구의 소행인지를 백방으로 탐문하였으나 그곳 사람들은 워낙 놀란 가슴이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뿔뿔이 피하여 달아나기만 하고 아무리 신문사 직원이라고 하여도 시종 독립단인지 경관인지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모습으로 분명 어떠한 사람들로부터 “그날 밤에는 화광이 층천한 바람에 비로소 무슨 일이 났나보다 생각하였으나 원체 위험한 까닭으로 가보지 못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불만 여전히 탈 뿐이었는데 간혹 피해자의 문전에서는 “지까다비”(일본 버선)자리가 어지럽게 박혀 있을 뿐이더라“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수군수군하는 눈치를 보아 이와 같은 참혹한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 것은 분명한 일이나 사람 죽이기를 물 마시듯 하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조사할 길이 없더라.

● 오늘은 좀 복잡한 사건에 대한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사진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세상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비극을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 이즈음부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79 “26세의 일본 청년은 왜 히로히토 황태자를 총으로 쏘았을까?” 포스팅에 대해 일부 독자들께서 왜 황태자라는 표현을 썼느냐고 힐난하셨습니다. 필자로서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백년 전 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쓰되 띄어쓰기와 두음법칙 정도만 고치는 것이 기록에 대한 충실한 고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을 표해주셨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 그 기사를 다루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존경의 의미보다는 일본 내에서도 천황의 아들이 분노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문화정치라곤 하지만 식민 시대의 엄혹함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기사 배치였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동아일보 사진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다시 신문을 찍었던 사건에 등장하는 사진일 겁니다. 사그런데 그 당시 기자들이 남긴 유산은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본 사진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큰 용기와 고뇌의 끝에 ‘겨우’ 남긴 기록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100년 전 신문에는 좀 더 가벼운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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