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8 (토)

[손관승의 리더의 소통] '네트워킹 달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현대인들은 네트워킹에 목말라한다. 조찬 모임, 포럼 등을 통해 사람을 사귀고 지식과 정보를 얻느라 시간과 비용을 들인다. 인맥을 구축하고 해외 행사에 참여하는 만큼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여행기, 리더십, 국가 경영, 소설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네트워킹 관점에서도 훌륭한 참고서다. 연암은 나이 마흔네 살 때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단에 선발된다. 정식 수행원이 아닌 '반당(伴黨)', 즉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자제군관 자격이었지만 대륙을 관찰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여행길에서 털어놓은 연암의 마음이 애처롭다. "우리나라 선배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바다 한구석을 벗어나지 못해, 마치 반딧불이가 나부끼고 버섯이 한군데에서 시들어 버리듯 살았습니다."

이처럼 갈증이 심한 연암이기에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호기심의 피뢰침을 높이 올린다. 하이라이트는 황제의 피서산장 소재지 열하, 연암의 표현처럼 '천하의 두뇌'가 모인 곳이었다. 사신단이 숙소로 배정받은 태학관에는 만주족과 한족 학자, 몽골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고 있어 연암의 네트워킹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 교류 기록을 '태관유관록' '경개록'이란 제목으로 따로 분류할 정도다. "같은 건물에 함께 생활하며 밤낮으로 상종하니 피차에 나그네 신세로 번갈아 초대하고 초대받는 주객이 되어, 무릇 엿새 동안 함께 있다가 흩어졌다."

한족 지식인 윤형산과 왕민호, 조상이 조선 출신이라는 귀주 안찰사 기풍액 등과 특히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를 통해 연암이 양고기를 싫어하고 땅콩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청나라 고위 관료 출신 70세 윤형산은 연암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특별한 당부를 남긴다. "그동안 뵈오니 선생은 술도 잘 드시고, 한창 나이라 응당 여색도 좋아하실 터인데,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삼가시고 몸을 수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암은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 지식인들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나이 차이도 잊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통해 '백탑시파'를 결성하고 있었다. 대부분 연암보다 먼저 중국을 다녀와 북학파라 불리게 되는데, 그 네트워킹의 힘을 빌릴 수 있었다. 과학기술에 식견이 높았던 친구 홍대용의 중국 자료와 경험도 섭렵하였다. 국내에서의 네트워킹이 해외로 확장된 것이다. 일본 학자 후마 스스무가 '연행사와 통신사'에서 조선시대 여행기 상당수는 음풍농월과 추상적 묘사로 일관하거나 심지어 이전의 기록을 베끼기까지 했다고 뼈아프게 지적한 적 있지만, 열하일기는 그와는 멀다. 풍부한 숫자 기록은 기존 여행기와 특히 차별되는 점이다.

'질문이 그르면 답이 올바를 수 없다'는 미국 작가 어설라 러귄의 말처럼 네트워킹은 질문과 대답 능력에 달렸다. 말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연암은 예상 대화 주제를 열심히 가다듬었다. 한족 선비 곡정 왕민호와 토론 주제를 보면 천문학과 자연과학에서부터 종교, 정치,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는다. 한문 실력이 출중했어도 중국어를 말하지 못했던 연암은 어떻게 소통했던 걸까? 드물게 통역의 도움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필담으로 소통하였다. 18세기 조선에서 사용하던 한문은 대륙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최대한 당대 중국어와 가까워지도록 노력한다. '열하일기'에 기록된 중국인들의 구어체는 현대 중국어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필담을 적은 종이 조각들이 연암의 독창적 사유와 만나 조선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가 탄생한다. 연암은 대화 상대에게 건넬 목적으로 청심환 십여 개를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으니 네트워킹에서 차지하는 선물의 필요성을 간파한 것이다. 이쯤 되면 연암은 네트워킹의 신 아닐까?

[손관승 리더십과 자기 계발 전문 작가 ceonomad@gmail.com]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