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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간첩 누명 씌워 ‘이중스파이’로…“아버지 억울함 언제 풀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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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병호씨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1971년 9월23일자 동아일보 지면 기사


“진실화해위원회(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재심에 다시 용기를 낸 건데….”



서아무개(34·여)씨가 아버지(고 서병호, 1936년생, 2021년 사망) 사건의 재심을 신청한 이유를 설명하며 말했다. 서병호씨는 1970년대 초반 재일 유학생 출신을 간첩 혐의로 영장 없이 검거한 뒤 공작원으로 활용한 이른바 ‘역용 공작’의 피해자다. 딸은 아버지 서씨가 겪은 일을 “30대 젊은 청년이었던 아버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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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일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서씨는 귀국 뒤 1971년 돌연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보안사는 서씨가 ‘통일조선신문사’에 입사해 통일연감 원고 번역을 담당하고, 조선인장학회에 가입해 장학금을 받은 점을 체포 이유로 들었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공작원에 의해 포섭돼 국내에 잠입했다’며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를 씌운 것이다.



보안사는 서씨를 간첩 수사에 활용하려 했다. 보안사 내부 수사 기록에는 1971년 보안사가 대일 공작원을 통해 일본 유학생 서씨의 귀국 첩보를 입수하고, 서씨를 간첩 혐의 대상자로 검거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보안사는 서씨를 신문하며 서씨를 재일 대남공작원 상부자들을 유인하고 검거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서씨에게 전향서 및 서약서를 쓰게 했다.



서씨는 “나는 나의 가족 및 모든 주변 사람에게 위장구실을 철저히 하여 보안을 유지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귀 부대의 공작내용을 발설치 아니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행동지침도 작성해야 했다. 보안사는 서씨의 직장 침투비, 하숙비, 피복비 등을 포함한 소요 공작금을 책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전상 문제가 생기자 보안사는 서씨를 곧바로 구속 송치했다. 보안사는 ‘공작종료 보고’ 문서에 “(암호) 해독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한 상부선과 연락이 불가능하여 공작을 종료하고 구속 송치하고자 하니 승인 바란다”고 적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서씨의 공소 사실을 그대로 유죄로 인정해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을 선고했고, 1972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서씨는 그뒤 변호인에게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등을 당했다며 “‘내가 죽게 되겠구나’ 생각하고 무서운 마음에 수사관이 원하는 대로 허위자백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검찰에 송치되고서도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고 조작된 허위자백 진술이라고 주장했지만 무시당했고 법정에서도 ‘고문받고 한 허위진술’이라고 말했으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며 “고문받았다고 해도 정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시절이었다”고 했다. 서씨는 1983년 10월24일에 감옥에서 나왔다. 만기출소였다.



서씨는 2017년 재심을 요청했지만 법원은 “판결문의 범죄사실 기재만으로 1971년 4월 초순경부터 9월경까지 불법체포·감금되어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피고인 진술만으로는 가혹 행위 증명이 어렵다”며 이를 기각했다. 서씨는 그로부터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딸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진실화해위의 문을 두드렸다. 진실화해위는 올해 1월 보안사 내부 수사기록을 통해 서씨가 보안사에 불법 구금됐고, 보안사 직원들이 직무 범위를 벗어난 수사를 했다고 판단하며 과거사 피해자로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의 ‘역용 공작계획’ 문서 등이 확보됐다. 진실화해위는 서씨가 1971년 5월1일 영장 없이 검거돼 같은 해 9월22일 역용 공작이 종료될 때까지 불법 구금, 가혹 행위 등 불법적 수사를 받고 공작원으로 활용됐다며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 6월 딸 서씨가 재심을 신청했지만, 고압적인 검찰의 태도는 여전하다. 검찰이 지난달 26일 제출한 재심 관련 의견서에는 “수사기관의 불법구금, 가혹 행위가 확정판결에 준하는 정도로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진실화해위의 조사 내용을 전면 부정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소송은 딸에게 남겨진 큰 과제가 됐다. 딸 서씨는 “진실화해위 결정에 반박할 만한 증거도 없이 검찰이 이렇게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된다”며 “생전 아버지가 바랐던 무죄 소식을 들고 아버지의 납골당에 찾아뵐 수 있을 때,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씨를 대리하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특정한 하나의 사건과 관련해 역용 공작 계획과 내용을 담은 공식 문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진실화해위의 권고를 이행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인 검찰은 조사 결과를 존중하고, 유족들의 명예와 피해회복을 방해하는 반인권적인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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