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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박중현 칼럼]‘커트라인’ 선상의 정치인들, 과거로 회귀하는 정책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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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대통령, 기초연금 구조개혁 포기

李대표, 여전히 ‘기본소득’ 우려먹기

韓대표, 금투세 폐지에 총력전

미래를 위한 혁신·개혁은 어디에

동아일보

박중현 논설위원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죄송한 마음입니다.” 2013년 9월 말. 박근혜 대통령은 기초연금 대선 공약을 축소하기로 한 데 대해 청와대 국무회의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모든 어르신들께 20만 원을 지급할 경우 2040년에 157조 원의 재정 소요가 발생해 미래 세대에 과도한 부담을 넘기는 문제가 지적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18대 대선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핵심 공약이 기초연금이었다. 하지만 집권 후 재정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근혜 정부는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10만∼20만 원씩 차등 지급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야권의 비판이 쏟아졌고, 대국민 약속 위반에 반발해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하는 ‘항명 파동’까지 벌어졌다.

이달 초 윤석열 정부가 첫 연금개혁안을 공개하면서 현재 최대 월 33만5000원 수준인 기초연금을 단계적으로 40만 원으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소득 하위 50% 이하 노인은 2026년에 월 40만 원까지 인상하고, 2027년에는 하위 50∼70% 노인으로 범위를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에 ‘기초연금 40만 원’ 대선 공약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5월 21대 국회 막바지에 여야의 국민연금 모수개혁안이 바짝 접근했을 때 정부가 이를 걷어찬 이유는 ‘국민연금만이 아닌 연금체계 전반의 구조개혁 필요성’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구조개혁 대상은 고령화 진전에 따라 재정 투입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기초연금이다. 건전 재정, 약자에 대한 선별 지원을 강조하는 보수 정부라면 대상을 하위 50% 이하로 줄여 두텁게 지원하거나, 하위 50∼70%의 지급액을 동결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한다.

기초연금 사안에 대한 박 정부와 윤 정부의 결정적 차이는 대통령 지지율이다. 최근 윤 대통령 지지율은 ‘레임덕 커트라인’으로 불리는 20%까지 떨어졌다. 11년 전 60%가 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의 3분의 1 수준이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각종 의혹, 끝이 안 보이는 의정 갈등으로 악재가 산적한 현 정부에 지지율을 더 깎아내릴 수 있는 개혁을 기대하는 건 난망한 일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 대통령과는 종류가 다른 ‘사법 커트라인’에 쫓기고 있다.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1심 판결이 한두 달 안에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최종심이 나올 때까지 국회의원직, 당 대표직을 내려놓을 리 없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유죄 판결이 나오면 야권과 지지층의 동요는 불가피하다. 사법 리스크 대응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일까. 이 대표의 ‘민생개혁’ 시계는 3년 전에 멈춰 선 느낌이다.

19일 민주당은 이 대표의 대표 정책인 ‘지역화폐법’을 본회의에서 단독으로 처리했다. 앞서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 지원금법’을 뒷받침하는 법안이다. 이 대표가 아무리 지역화폐의 장점을 주장하더라도 지역화폐 할인액을 정부 재정으로 보조해주는 효과는 국가 경제 전체로 볼 때 미미하다는 게 대다수 경제학자의 의견이다. 25만 원법, 지역화폐법은 대선 후보 시절 ‘기본소득 공약’의 변주란 점에서 시간이 지나도 전혀 발전이 없는 재탕, 삼탕 정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금주 초 취임 두 달을 맞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심리적 커트라인’에 몰리고 있다. 김 여사 문제, 의정 갈등 해법을 놓고 용산 대통령실과의 신경전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층) 공략에 뭐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초조감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요즘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사안이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의 폐지다.

각자 나름의 리스크에 쫓기고 있는 윤 대통령, 이 대표, 한 대표의 이해가 한 점에서 모인 것이 금투세 문제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청년층이 다수 포함된 1400만 주식 투자자를 의식해 금투세 폐지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금투세 도입을 전제로 깎아준 증권거래세를 원상 복구하는 데 대해선 입도 뻥끗 않는다. 물론 지지율에 득이 될 게 없어서다. 이 대표는 ‘부자 과세’ 강행을 주장하는 당내 세력 및 ‘개딸’을 의식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식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자신에게 몰아칠 사법 리스크 방어를 위해 어느 쪽 하나 포기하기 싫어서다.

민주당이 어제 금투세 문제를 놓고 정책토론까지 벌였지만 이 대표 의중이 ‘유예’ 쪽이어서 결국 시행이 미뤄질 공산이 크다. 2023년 2년 유예에 이은 두 번째다. 금투세 논의는 사실상 2020년 말 법 도입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단 1%의 지지율 하락도 버텨낼 능력이 없는 커트라인 선상의 정치인들 때문에 한국의 정책 시계가 과거를 향해 표류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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