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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젊어선 독재에 맞서, 나이 들어선 특권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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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혁명가’ 장기표 별세

조선일보

1972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장기표가 구형 공판을 받는 모습(왼쪽사진). 장기표는 1970~90년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회의원 특권폐지를 촉구하며 인간띠로 국회를 에워싸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습. 장기표는 특권폐지당을 창당해 지난 4월 총선에 도전했지만 원내 진입에는 실패했다. /조선일보DB·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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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보리굴비 곁들인 소찬이 그와의 마지막 식사였다. 담낭암 4기.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으니, 가족과 함께 손잡고 다 같이 우시라”는 선고를 받고도, 장기표는 밥 먹는 내내 나라와 지구를 걱정했다. “국민소득이 3만5000달러인데도 다들 불행하다고 한다. 과도한 욕심, 과도한 소비로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 재앙이 오고. 코로나 팬데믹이 이걸 경고한 건데 우리는 다 잊고 다시 바보들의 행진을 하고 있다.”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겠다며 항암 대신 숲속을 맨발로 걷겠다던 장기표의 입원 소식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1일 문자로 왔다. 복수가 차올라 항암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내 조무하(73)는 “무너진 체력으로도 잘 견뎌냈는데 항암 주사 맞고 6일이 지나면서 혈압이 떨어지고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갔다”며, “병세가 호전되나 싶어 음식도 먹고 물리치료도 받았는데 오늘(22일) 새벽 갑자기 떠나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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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에 추서된 국민훈장 -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기표 선생 빈소에 국민훈장이 놓여 있다. 훈장은 이날 고인 별세 직후 추서가 결정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전달했다. /이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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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투쟁을 함께 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 말대로 “창랑(滄浪)의 물처럼 살아온” 인생이었다. 터무니없는 자존심,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이 그의 ‘죄’였다. 재야의 동지들조차 그를 ‘시대의 몽상가’라며 피해 다녔다. 그때마다 자신은 지독한 현실주의자라고 반박했다. “길을 가는데 술 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본지 2021년 7월 10일 자)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보고 학생운동에 뛰어든 뒤 돈키호테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장리쌀로 고통받는 빈농 아버지를 보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게 국민학생 때였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1971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 피복 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장기표는 소련 붕괴 후 독자적 행보를 했다. 제도권으로 앞다퉈 들어간 민주화 동지들과 달리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했고 낙선했다. 김대중·이명박 정부에서 공천과 입각을 제안받았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기존 정당으로는 우리나라 고질병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치권력이 된 진보 진영과 귀족화된 노동계를 ‘운동권 사쿠라’라고 질타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문재인에게는 최순실이 열 명이 될 것”이라 했고, “민주노총은 망국의 제일 적(敵)”이라 비판했다. 민청학련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기표는 “민청학련 사건 등은 다 실체가 있었고 당시 실정법을 위반했다. 재심 법정에서 해석을 달리해 무죄로 받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본지 2019년 6월 3일 자) 억대에 달하는 민주화 운동 보상금을 “파렴치한 짓”이라 일갈하며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장기표는 너무 맑은 일급수라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으나,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이 문통과 더민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약자의 편에 서는 점’으로 꼽지만 그들이 약자 편에 서는 경우는 자신들 가진 것이 침해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다. 장기표는 다르다. 그의 삶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초지일관된 노력의 연속이었다. 무수한 유혹들을 뿌리치고 소위 ‘안 되는 길’만 고집함으로써, 그동안 쌓았던 명예와 동지들을 잃었다.”

장기표의 곁을 끝까지 지킨 건 아내 조무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도망 다니던 1976년,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는 다방에서 커피 두 잔 놓고 장기표와 결혼한 조무하는 논술 교사로, 교습소와 문화 센터 강사로 생계를 이으며 두 딸을 키우고 남편을 옥바라지했다. 아이들이 아빠 얼굴 잊을까 봐 면회 갈 때마다 데려갔더니, 하루는 큰딸이 ‘엄마, 내 짝은 서울구치소를 몰라’ 하며 으쓱해하더란다. 감옥에 있을 때 매일 밤 10시로 시간을 정해 부부가 신약성경을 함께 읽어 나갔다는 일화가 적힌 장기표의 책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는 당시 운동권 남녀들의 연애 교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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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하경


투사 장기표는 사상가이기도 했다.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행복 정치론’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경제활동이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바뀌어야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마지막 저서가 된 ‘위기의 한국, 추락이냐 도약이냐’는 지난 4월 총선에서 특권폐지당이 원내 진입에 실패한 것에 낙담한 뒤 두 달간 밤새워 쓴 책이다. 장기표는 “오직 집권욕에만 사로잡힌 여야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뤄 나라와 민생을 거덜내고 있다.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고 질타했다.

장기표 부고를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60년지기 이재오 전 의원이다. 이부영 전 의원과 김문수 장관도 달려와 조문객을 맞았다.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을 지낸 한석호는 “‘장키호테’로 불린 저돌적 실천가 장기표 선생이 시대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전태일 열사, 이소선 여사와 얼싸안고 평안히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했다.

불평등 세상을 전복시키겠다던 20대의 장기표에게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임을 일깨웠다는 전태일은, 하늘로 돌진해 온 자신의 ‘대학생 친구’에게 뭐라고 인사를 건넬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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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장기표(왼쪽 둘째)와 조영래(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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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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