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의 작은 도시, 그 안을 깊이 파고들수록 무한한 여행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버킷리스트에 적어 놓은 유명 관광명소를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한번쯤은 낯선 소도시로의 여행을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 떠나본 이라면 여행이 늘 화려하고 진귀한 경험만을 안겨주진 않는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히디르리크 언덕에서 만난 현지인들 |
노트북 드라이브 용량에 빨간 불이 켜진 걸 확인한 건 몇 주 전이었다. 노트북에 저장된 수많은 문서와 사진, 폴더 정리를 내일로 미루기를 여러 번, 저장공간이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나자 그제서야 황급히 대청소를 시작해야 했다. ‘여행작가’를 업으로 삼고 있기에 드라이브 용량의 8할을 차지했던 건 다름 아닌 세계 각지에서 촬영한 사진파일들. 여러 폴더에 담긴 수천 장의 사진파일을 들여다 보는 동안 한 가지 여행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명 관광지를 벗어날수록 촬영한 사진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 특히 유럽 국가 관련 폴더에서 이 패턴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튀르키예 이스탄불과 체코 프라하, 그리스 아테네, 독일 뮌헨,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의 폴더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상태지만 이들 나라의 다른 소도시로의 여행 사진 속에는 ‘여행작가’로서 업무에 충실했던 순간들이 꽤 담겨 있었다. 소도시가 주는 매력은 바로 그 ‘소소한 재미’에 있다. 그 나라와 그 도시에 한 뼘 가까워질 수 있는 여행의 재미가 소도시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지명 자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는 점이 여행의 흥미를 끌어올린다.
드라이브 대청소를 마친 후 사진 폴더 가운데 어렵사리 유럽 소도시 네 곳을 추렸다.
#1. 튀르키예 사프란볼루
“오스만 도시의 흔적을 산책하다”
“오스만 도시의 흔적을 산책하다”
사프란볼루 도심 전경 |
튀르키예는 세계적인 관광대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지리적 측면에서는 남유럽으로 분류되지만 서아시아와의 접점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혼재된 특징이 관광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높이는 배경이다. 특히 고대 로마나 오스만 제국, 그리스 유적, 이슬람교 성지, 초창기 기독교 유적 등이 튀르키예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은 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기에 충분한 요소. 이 중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럽을 위협했던, 이슬람 국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국력을 보유했던 오스만 제국의 흔적을 튀르키예 북동부 소도시에서 살필 수 있다.
도시의 이름은 사프란볼루(Safranbolu). 오스만 제국 당시 경제적 및 문화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도시로서, 11세기 이후 이스탄불과 시노프(Sinop,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를 잇는 무역 중심지로 군림하며 수세기 동안 ‘부유한 마을’이란 타이틀을 놓지 않았다. 당시 고급 나무와 스터코(Stucco, 건축 외장재)로 지은 화려한 주택과 건축물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는데, 그 많은 건축물이 현재의 사프란볼루를 정의하는 대표적인 타이틀로 불린다. 다시 말해 오늘날 전형적인 오스만 도시로 대표되는 이곳은 튀르키예를 구성하는 역사 지구 중 하나다. 현재까지도 잘 보존된 오스만 시대의 건물은 사프란볼루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요인이었고, 도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주요 무기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토카틀리 협곡 카페의 튀르키예식 홍차, 숯불 위에서 끓여내는 튀르키예식 커피,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사프란볼루 |
소도시 여행의 매력은 산책의 즐거움에도 있다. ‘사프란볼루하우스’라 불리는 이곳의 주택과 건축물을 산책하며 둘러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이곳에는 약 2,000개가 넘는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물이 있으며, 이 중 약 800개는 정부에서 보호하고 있다. 자갈길, 역사적인 모스크, 터키식 목욕탕, 중세 시장이 배경을 바꿔가며 산책의 즐거움을 높여준다. 이 모든 배경을 동시에 눈에 담기 위해선 언덕에도 올라야 한다. 도시 중심가에서 남쪽 방향으로 히디르리크 언덕(Hidirlik Hill)이 고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언덕 꼭대기는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부유한 마을을 훤히 비추며 당시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사프란볼루 도심을 벗어나서 북쪽으로 5~6km가량 떨어진 토카틀리 협곡(Tokatlı Kanyonu)은 반나절 여행으로 계획하기 좋은 장소다. 수천 년에 걸쳐 히자르 강 바닥의 석회암층이 침식되어 형성된 협곡에는 약 9km에 달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유리 테라스, 동굴, 카페 등의 관광명소가 자리한다.
히디르리크 언덕에서 바라다본 오스만 도시 전경, 수천 년에 걸쳐 석회암층이 침식되어 형성된 토카틀리 협곡 |
#2. 폴란드 자코파네
“절대 놓칠 수 없는 하이킹 명소”
“절대 놓칠 수 없는 하이킹 명소”
타트라 산맥에서 가장 큰 호수인 모르스키에 오코 |
“자코파네(Zakopane)는 무조건 꼭 방문해야 해.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가. 무조건 가.” 폴란드인 친구에게 여행지 추천을 부탁하자 가장 먼저 돌아온 대답이었다. 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뉘앙스가 그의 메시지에서 강하게 풍겼다. 뒤이어 그가 덧붙인 설명에는 “자코파네는 폴란드인이 가장 여행하기 좋아하는 도시”라고 했다.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해보니 폴란드 남부, 슬로바키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타트라 산맥(Tatra Mountains) 기슭에 위치한 도시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에 걸쳐 형성된 타트라 산맥은 일명 ‘스키 산’이라 불릴 만큼 그 일대 유명 스키 리조트가 자리해 있어 ‘겨울스포츠왕국’이라 불리는 곳이다. 폴란드에서는 자코파네를 ‘겨울 수도’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는 “겨울뿐 아니라 사계절 어느 시기에 가더라도 자코파네는 훌륭한 여행지가 될 것”이라고 전해왔다. 무엇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여행자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도시라는 것. 그의 강력한 조언과 안내에 따라 자코파네에서의 하이킹을 놓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마차를 타고 호수로 이동이 가능하다. |
자코파네 도심에서 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시를라(Cyrhla) 마을이 하이킹의 출발지점이다. 이 일대에는 나무로 지은 목조주택이 즐비하고, 하이킹을 목적으로 찾은 대다수의 여행자들이 이 마을에서 여장을 푼다. 시를라 마을에서 남쪽 타트라 산맥까지 가는 하이킹 코스는 수십 개에 달한다. 소나무 숲을 지나 하이킹만으로 도달하는 코스는 물론 미니버스나 차량, 마차를 이용해 비교적 쉽게 이동한 뒤 포장도로를 걷는 코스도 있다. 두 발이냐, 네 바퀴냐 이동수단은 다를지 몰라도 최종목적지는 거의 동일하다. 자코파네를 넘어 폴란드의 자랑으로 꼽히는 ‘모르스키에 오코(Morskie Oko)’ 호수가 바로 그곳이다.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는 해발 1,395m에 위치한 타트라 산맥에서 가장 크고 네 번째로 깊은 호수다. 이곳은 ‘바다의 눈’이라는 호수의 이름처럼 뛰어난 경치는 물론 접근성이 좋아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까지의 하이킹 코스가 호수의 뛰어난 경치만큼이나 특별함을 선사하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을 하염없이 지나친다는 점이 그 특별함을 배가시킨다. 시를라 마을에서 모르스키 호수까지 총 왕복 16km로 곳곳에 안내된 표지판을 따라 초보자라도 쉽게 하이킹이 가능하다.
울창한 숲속에 조성된 하이킹 코스, 하이킹 거리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
#3. 체코 브르노
“여유가 넘치는 도시를 어슬렁거리다”
“여유가 넘치는 도시를 어슬렁거리다”
브르노 시내 중심가 전경 |
프라하 카를교(Charls Bridge)에서 바라다보는 주변 경치는 듣던 대로 황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 다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제외한다면.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석조다리의 하나로 손꼽히는 카를교의 풍경을 훗날 생각하면,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바글바글한 도떼기 시장이 떠오를 것 같다. 여행작가를 업으로 삼고 있기에 이곳 저곳 방문할 기회가 많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멋들어진 곳이라 하더라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는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 피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체코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브르노(Brno)를 찾은 건 그 아쉬움을 채우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수치상 두 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프라하와 비교하면 소도시에 가깝다. 관광객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브르노 시내 중심가에 닿으면 여유로운 발걸음을 느끼게 되고, 이내 도시의 정체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브르노에서의 발걸음이 여유롭다 못해 너무나 시시해서 실망감을 표출할지도.
브르노 시내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 |
#4. 조지아 시그나기
“와인과 요새, 가장 작은 도시에 오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조지아에 닿으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도시가 바로 시그나기(Sighnaghi)다. 그저 지나가다 만나는, 특별할 것 없는 도시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곳에 도달하고 난 뒤 예상은 현실과 달랐다. 소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거란 새로운 예상이 이 도시의 첫인상을 완성했다. 그냥 지나칠 게 아니라, 조지아를 여행한다면 한번쯤 방문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은 후다닥 머리를 에워쌌다. 그제서야 나름 스스로 도시를 새롭게 정의하며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와인과 요새, 가장 작은 도시에 오르다”
시그나기 구시가지 |
조지아의 동쪽 지역인 카헤티(Kakheti)에 위치한 시그나기는 조지아에서 가장 작은 도시 중 하나다. 조지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생산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남코카서스의 비옥한 계곡과 경사지에서는 최소 8000년 전부터 포도 재배와 신석기 와인 생산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수천 년에 걸친 와인 양조는 오늘날 조지아의 국가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경제적 기반을 이루는 주요 요소다.
조지아 전역에서 다양한 포도 품종을 바탕으로 와인이 생산되고 있는데, 카헤티가 바로 대표적인 와인생산지 중 한 곳이다. 시그나기는 카헤티 중심부에 위치하며 이 일대 와인 농장을 방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도시를 찾은 경우가 적지 않다. 와인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시그나기는 놀라운 풍경과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며 방문객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18세기에 건설된 탑이 있는 방어벽 |
시그나기는 역사적으로 도시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주요 요새로 건설되었다. 약 4km에 이르는 여러 개의 문과 탑이 있는 구조다. 이곳에는 옛 방어벽의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어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잘 보존된 18세기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구시가지는 시그나기에서 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인상 깊은 활동이다. 구시가지 주변에는 탑이 있는 방어벽이 존재하며 좁고 자갈이 깔린 거리에는 전통적인 조지 왕조 시대 주택이 늘어서 있다. 시그나기 요새의 고대 도시 성벽을 따라 올라간 곳에서 아주 먼 옛날 주변 지역을 감시하고 경계태세를 갖췄을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구시가지 시장을 둘러보는 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재활용 플라스틱 병에 담긴 와인은 외관상 누군가 먹다 남은 와인을 판매하는 듯 보이지만 막상 시음을 하고 나면 신선하고 품질 좋은 와인 맛에 놀라게 된다. 주인장의 계속된 권유로 연거푸 시음하다 쉽사리 취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왼쪽부터)시그나기 지역 마켓, 지역 마켓에서 품질 좋은 와인을 맛볼 수 있다. |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7호(24.9.17-24 추석합본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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