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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논&설] TV토론의 진화…얼렁뚱땅 거짓말에 '즉석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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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TV토론의 진화…얼렁뚱땅 거짓말에 '즉석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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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선 후보 TV토론
미국 역사상 첫 대선 후보 TV 토론에 나선 공화당 리처드 닉슨(왼쪽) 당시 부통령과 민주당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논설위원 = 전통적으로 미국 대선 TV 토론의 승패는 비언어적 영역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후보가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는 그 말을 할 때 어떤 태도와 모습을 보이는지에 유권자들은 더 주목한다. 1960년 미국 대선 사상 첫 TV 토론에 등장한 존 F. 케네디 민주당 후보는 잘생긴 외모에 그을린 피부,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박력 있는 이미지로 안방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무릎 통증 탓인지 초췌해진 안색에 듬성듬성 자라난 수염, 흰색 손수건을 꺼내 연신 얼굴의 땀을 닦아내는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와 확연한 대조를 이뤘다. 1992년 재선에 도전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경기침체가 후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는 한 여성의 질문이 나온 순간 무심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낭패를 봤다. 2000년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맞붙었던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자주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크게 실점했다. 지난 6월 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의 토론에 나선 조 바이든 대통령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문장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대선 중도 포기라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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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현지시간) 미국 대선 후보 토론을 맡은 ABC 앵커 데이비드 뮤어(왼쪽)와 린지 데이비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국립헌법센터에서 열린 대선후보 TV 토론에는 새로운 포맷이 등장했다. 사회를 맡은 ABC뉴스 남녀 앵커가 토론 도중 대선후보의 발언을 즉석에서 검증하는 '실시간 팩트체크'를 도입한 것이다. 막말과 거짓말, 음모론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후보가 주로 제지받았다. 낙태 관련 토론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에 죽이는 주(州)가 있다"고 트럼프가 주장하자 여성 앵커인 린지 데이비스가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죽이는 것을 합법화하는 주는 없다"고 태클을 걸었다.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의 아이티) 이민자들이 주민들이 기르는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트럼프의 기괴한 주장에 데이비드 뮤어 앵커가 "시 운영자에게 전화해보니 신뢰할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 것이 압권이었다. 트럼프가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범죄율이 급증했다"고 주장하자 뮤어는 "연방수사국(FBI)은 미국에서 전반적인 폭력 범죄가 실제로 감소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즉석에서 제동을 걸었다. 모처럼 후보의 '이미지' 못지않게 토론의 '콘텐츠'에 집중하는 계기가 됐다는 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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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열린 바이든·트럼프 TV 토론 [AP=연합뉴스 자료사진]


통상 대선 TV 토론에서 사회자는 '끼어들기'를 금기시해왔다. 후보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유권자들의 판단을 왜곡하거나 오도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한마디로 심판이 선수로 뛸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삐끗했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공격을 받을 리스크가 큰 점도 작용했다. 1960년 이후 전통적인 패널 질의응답이나 타운홀 미팅 방식 등으로 토론의 형식이 변천하기는 했지만, 사회자가 늘 '진행자'의 역할에 머물렀던 까닭이다. 그러나 지난 6월 CNN 방송이 주관한 바이든·트럼프 토론을 계기로 후보들끼리 서로의 주장을 다투는 기존 포맷에 대한 근본적 회의론이 대두했다. 트럼프가 30차례 넘도록 허위 사실이나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데도 사회자들이 이를 그대로 방치한 데 대한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 토론을 주관한 방송사가 뒤로 물러나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됐고, 그 결과 사회자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토론의 새 포맷이 등장했다. 해리스·트럼프 두 후보 측은 ABC가 제안한 달라진 '그라운드 룰'과 사회자 선정에 동의하고 토론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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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공정성 논란을 극복해야 하는 건 과제다. 현미경 검증을 당한 트럼프 후보 측은 이번 토론이 사실상 '3(해리스+사회자 2명) 대 1' 구도였다며 ABC를 맹비난하면서 방송 허가 취소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분이 풀리지 않은 트럼프는 공개석상에서 "그 어리석은 앵커가 내 발언을 바로잡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뒤끝 작렬하는 모습도 보였다. ABC 측은 잘못된 주장을 근거를 갖고 검증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공정한 사회자로서의 역할을 좀 더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즉석 팩트체크'는 양극화 현상에 찌들어 거짓말과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는 미국 정치를 일정 정도 정화해주는 유의미한 실험이었다고 평가받는다. NYT는 "근거 없는 주장을 쏟아내는 트럼프 주변에 사실의 가드레일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미국 주요 언론사들이 토론 도중 각자의 플랫폼을 통해 30∼40여건의 실시간 팩트체크를 시도한 것도 언론의 새 공적 책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팩트를 무시해도 괜찮은 문화가 형성된 우리 정치에 묵직한 시사점을 준다. 정치 공방의 뒤에 숨어 근거 없는 주장을 하거나 가짜뉴스를 퍼뜨려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해악이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정치를 만들 몫은 우리 정치권과 언론, 나아가 시민 모두에 있다.

r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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