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레바논에서 삐삐가 폭발하며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다. 이 폭발로 2700여명이 사상했다. EPA=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친이란 세력과 동시다발적인 무력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노린 무선 호출기(삐삐) 폭발 사건이 발생, 최소 12명이 숨지고 2800여명이 다쳤다. 헤즈볼라는 해킹을 통한 이스라엘의 위치 추적 등을 피하기 위해 최신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삐삐를 도입했는데, 이를 역으로 이용한 되치기에 당한 것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레바논 도심의 식료품점과 차도, 집 등에서 일제히 무선호출기(삐삐)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건 17일(현지시간) 오후 3시30분이었다. 곧이어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이 쓰러졌다. 삐삐 소리는 1시간 동안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와 동부 등 헤즈볼라의 거점에서 울려 퍼졌다. 피바다가 된 거리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헤즈볼라가 조직원들에게 보급한 삐삐 중 최소 수백 대가 동시에 폭발한 것이었다. 로이터 통신은 헤즈볼라가 5000대의 삐삐를 수입했고, 이 가운데 3000대가 폭발했다고 보도했다.
헤즈볼라 대원들이 대거 삐삐를 가지고 있던 이유는 지도부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 2월 “휴대전화를 부수거나 묻어 버려야한다”고 조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이스라엘이 휴대전화 도청이나 위치 추적 등을 통해 헤즈볼라 요인 암살 등 공격 목표를 특정하는 일이 반복되자 아예 통신 수단 자체를 극단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한 것이다. 한국에선 휴대전화에 밀려 퇴출된 지 오래된 삐삐는 간단한 단문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쓰인다.
17일 삐삐 폭발이후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실려오고 있다. EPA=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헤즈볼라는 즉각 이를 이스라엘에 의한 테러로 규정했다. 다수의 서방 언론 역시 이번 공격 뒤에는 이스라엘의 대외 정보 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방위군(IDF)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이 맞다는 전제로 구체적으로 삐삐에 폭발물을 심은 수법에 대한 보도도 이어졌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헤즈볼라가 수입한 삐삐는 대만의 골드아폴로의 AR924기종이다. 이와 관련, 골드아폴로의 쉬칭광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우리 회사 제품이 아니다. 상표만 우리 회사 것”이라고 납품 사실을 부인했다. 유럽의 유통사인 BAC가 상표권 계약을 맺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생산한 삐삐라는 설명이다. 다만 BAC에 대한 추가 질문에 쉬 회장은 자리를 피했다. 대만 정부는 삐삐가 레바논에 수출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레바논 고위 소식통은 “모사드가 생산 단계에서 기판을 개조했기 때문에 이번 소행을 탐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모사드가 아예 삐삐가 만들어지는 공장에 침투해 폭발물과 기폭장치를 심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조작된 삐삐 물량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레바논으로 유입됐다.
로이터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BAC 주소지에는 회사 이름이 A4 용지에 인쇄돼 유리문에 붙어있었을 뿐, 아무런 활동의 흔적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BAC의 대표 역시 이메일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폭발 시점과 관련, 전직 이스라엘 당국자는 “(삐삐는) 헤즈볼라와 전면전에 대비해 심어놓은 부비 트랩이었으나, 헤즈볼라 내부에서 삐삐의 실체에 대한 의혹이 일어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이스라엘 당국이 작동시켰다”고 했다고 미 정치전문 매체 악시오스는 보도했다. 당초 전면전을 위한 기습작전 시 사용하려고 심어 놓은 장치였지만, 최근 삐삐에 의심을 품는 헤즈볼라 대원들이 생기자 곧바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폭발에 대해서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17일 이스라엘군이 전투기를 동원해 레바논 남부 마즈달 살렘 지역의 헤즈볼라 군사 시설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헤즈볼라가 직접 보복을 하거나 이란-하마스--후티(예멘) 등 친이란 ‘저항의 축’이 함께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최고사령관 푸아드 슈크르가 숨진 데 대한 보복으로 지난달 이스라엘 본토를 미사일과 드론 등으로 공격했다. 다만 이스라엘은 인명이나 시설 피해는 크지 않다고 주장했고, 헤즈볼라 역시 추가 공격은 감행하지 않아 확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한 만큼 헤즈볼라 역시 상응하는 대응에 나설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 헤즈볼라는 18일 성명을 통해 “레바논 국민을 학살한 적에 대한 가혹한 대응”을 선언했다. 레바논 정부의 나집 미카티 총리 역시 “레바논 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고 규탄했다.
이란도 이스라엘의 책임이라고 명확히 규정했다. “국제법과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행위로 형사 재판 대상”(나세르 카나니 이란 외무부 대변인) “이스라엘의 악랄한 테러 행위를 규탄한다”(아미르 사이드 이라바니 주유엔 이란 대사)면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번 폭발 공격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가운데 휴전 협상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미 국무부는 17일 “우리는 이 작전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관여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와 관련,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삐삐가 터지기 몇 분 전에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세부사항을 밝히지 않은 채 “레바논에서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악시오스는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은 18일 휴전 협상 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블링컨 장관은 “당사국들은 (가자지구에서) 긴장 고조행위를 해선 안 된다”며 “우리는 여전히 관련 정보를 입수 중”이라고 말했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과 중재국들이 논의해온 휴전 제안을 이스라엘에 제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박현준 기자 park.hyeonjun@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