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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노인 많은 단지는 재건축 안 된다고?···직접 현장에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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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무조건 재건축을 반대한다?

“재건축 추진, 노인 많다고 안 되는 것 아냐”

‘최고급 실버타운’ 불리는 압구정현대아파트

“10년 전부터 주민 세대교체”…매 신고가 경신

전문가들 “분담금 낼 수 있느냐 여부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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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타워에서 바라본 송파,성남 방향 아파트단지. 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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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신속통합기획이 확정된 송파구 장미아파트 주민 A씨(71)는 재건축이 달갑지만은 않다. 35년간 한 곳에 살았으니 필요성은 느끼지만 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막막하다.

A씨는 “세종시에 사는 딸이 자기 집 근처로 와서 살면 된다는데 세종에는 연고도 없고, 친구도 없다”면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평생을 내 집에 살다가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신속통합으로 하면 무조건 10년 안에 돌아갈 수 있다더니 벌써 상가랑 갈등이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며 “몇 년 안에 이곳을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건 뭐, 노인들만 따돌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B씨(40)는 몇 달 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 소유자 단체 채팅방에 가입했다. 어머니가 사는 이 아파트는 B씨도 결혼 전까지 함께 살던 곳이다. “여기가 사업성이 떨어지니까 30년이 지나도 재건축 이야기가 안 나왔거든요. 그런데 3년 전부터 안전진단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관리소장한테 가서 무슨 재건축이냐고 하셨대요. 다른 어르신들도 한 마디씩 하시고.”

그 뒤 아파트 단지 게시판에 ‘OO아파트 재건축 추진 소유자 모임’ 카카오톡 단체방 가입 안내문이 게시됐다. QR코드를 찍어서 가입한 뒤 소유자 인증을 하면 가입할 수 있다는 게시물이었다. B씨는 “그런 단톡방이 있다는 건 한참 뒤에 알았는데 부모님은 QR코드니, 오픈채팅방이니 이런 건 전혀 모르신다”면서 “안되겠다 싶어 내가 들어가봤는데 죄다 젊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고 말했다.

재건축 시장에서 소위 ‘불문율’처럼 떠도는 공식이 하나 있다.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피하라’는 것이다. 노인은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재건축 진행이 더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노인이 많은 단지는 재건축이 안 된다고?”


나이가 들수록 살던 곳에 계속 거주하고 싶어한다는 조사결과는 있다. 2020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은 건강이 유지된다면 현재 집(83.8%)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원하고, 건강이 악화돼도 집에서 재가서비스(56.5%)를 받으며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의 노인들이 살던 곳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노인주거복지영역에서는 이를 AIP(Aging In Place)로 설명한다. 심각한 병만 없다면 양로원이나 병원 등 시설로 가기보다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노인요양돌봄에서의 이론일 뿐이지만 정비사업에서도 무시못할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노인이 많은 아파트나 저층주거지에서는 재건축·재개발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을까? 반대로 노인 비율이 적은 구축 아파트는 재건축이 잘 진행되나? 이를 증명할 명확한 증거는 없다. 관련 통계나 연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재건축의 향방은 소유주의 나이보다는 ‘내가 얼마만큼 분담금을 감당할 수 있느냐’라는 경제력에 달려있다는 게 박 위원의 설명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송모씨(85)는 “우리가 재건축을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여기 재건축해도 어차피 못 살아. (자식들에게) 말은 안 하지만 애들한테 넘겨주고 끝내야겠다라는 생각은 해.” 송씨는 31년째 이곳에 거주중이다. 그는 “노인들 때문에 재건축 진척이 안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자기네들끼리 뭐가 안 맞아서 진척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합장도 해임했다가 다시 돌아오고 시끄럽잖아. 계속 저러고 있으면 15년이 지나도 재건축 되기 어려워. 처음에 재건축 이야기 나와서 조합 생길 때 그 사람들이 ‘10년이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다녔거든? 그런데 벌써 3년이나 지났어요. 이건 우리(노인) 탓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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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내 공인중개사무소 옆으로 주민이 지나가고 있다. 류인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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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2차는 1976년 6월 입주를 시작해 올해로 48년된 아파트다. 은마아파트(1979년 9월 준공)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은마아파트와 달리 압구정현대아파트는 유독 재건축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현대건설이 한강변 모래를 죄다 퍼다 엄청 튼튼하게 지어서 철거비용이 더 든다’는 소문과 함께, ‘노인이 너무 많아서 재건축 추진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고 이곳이 그동안 재건축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통상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묶어 이야기하지만 재건축을 추진하는 아파트는 압구정동 내 24개 단지를 모두 포함한다. 현대백화점 옆 단지에서부터 갤러리아백화점 옆 단지까지 한강변을 낀 전체 블록이 재건축 대상이다. 현재 6개 특별계획구역으로 나눠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10일 4구역이 조합설립 인가를 얻은 것을 시작으로 2·3·5구역이 조합설립인가를 받았다. 다만 이후 3년째 사업시행계획 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 해당 단지들은 집을 매수하면 조합원 지위까지 넘겨받을 수 있다. 그 덕에 집값은 더 천정부지로 뛰었다.

최근 강남 지역 신고가 거래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도 한 몫을 했다. 신현대 아파트 전용면적 183㎡는 지난달 8일 76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업계에서는 “비현실적이지만 100억원도 할 단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백화점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김모씨(81)는 “한 동네에 같이 살던 사람들은 재건축 이야기 나오고 집값이 갑자기 올랐을 때 꽤 많이 팔고 나갔다. 50억원 찍었을 때 이사 많이 나갔다”라고 말했다.

이사 계획이 있는지 묻자 김 어르신은 “녹물은 좀 나오지만 집을 정말 튼튼하게 지었다”면서 “아침먹고 산책 조금 하다가 이렇게 셔틀 타고 백화점 가면 친구들과 커피 한 잔 마시고 문화생활도 할 수 있어서 아직 이사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옆에는 ‘집을 팔고 나갔다’는 이웃들도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모씨(82)는 “이사는 갔지만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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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2월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 조합설립 창립총회 현수막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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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에서 20년 이상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해온 C씨는 “연세 많은 어르신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10년 전부터 세대교체가 많이 됐다”면서 “최근에는 60~80대보다 30~40대가 더 많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 때문에 재건축이 안 된다는 얘기는 말이 안 되고, 재건축 사업 자체가 진척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또다른 중개업소 관계자는 “여기는 토지거래허가구역이기 때문에 매수할 때 바로 입주하는 조건으로 거래가 이뤄지지만 다들 2년만 살고 세를 주고 나간다”면서 “실거주 목적보다는 투자 목적으로 많이 보러 오고, 연령대도 대부분 30~40대”라고 설명했다.

결국 압구정현대아파트 재건축은 추진동력이 약해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을 뿐 노인들을 재건축을 막는 요인으로 보기는 어려운 셈이다.

강북지역의 한 재개발조합장은 통화에서 “재개발은 아무래도 노인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될 사업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건축은 있는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으면 되잖아요? 재개발은 그런데 정비구역을 정하는 것부터 복잡하고, 기반시설 등 모든걸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사업추진이 더 어렵죠. 사실 재개발이든 재건축이든 핵심은 ‘분담금’이예요. 우리 같이 저층노후지역에 살던 노인들은 자기 분담금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되니까 결국 지분을 팔고 아예 떠나야 돼요. 그래서 재개발을 하면 원주민이 되돌아오는 비율이 20%밖에 안 돼요. 80%는 외지인이죠.”

강남의 한 재건축조합 관계자 역시 “고령층 거주자 문제라기보다 분담금이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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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6월 21일 경향신문. 당시에도 압구정현대아파트는 서울 내 대표 부촌 아파트로 꼽혔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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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층을 넘어가는 구축들은 조합원 몫을 빼고 나면 용적률을 엄청 상향하지 않는 한 일반분양 매물이 줄어들고, 분담금이 많이 나온다”면서 “사무실을 찾아오는 분들은 ‘돈 낼 여력 없다, 재건축 안 하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그건 개인사정에 따라 반대하는 것이지 나이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은 재건축·재개발 기간을 단축하는 ‘재건축·재개발사업 촉진에 관한 특례법’ 제정안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도정법 개정안에는 재건축 조합 설립 동의 요건을 전체 구분 소유자의 75%에서 70%로 낮추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2007년 12월 기존 80%에서 75%로 낮추는 도정법 개정 이후 17년 만이다. 동별 동의 요건을 2분의 1에서 3분의 1로 완화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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