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그것은 단지 서막이었다. 책을 불태우는 그곳에서,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될 것이다."
위의 글은 지금도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는 19세기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가 쓴 비극 작품 <알만조르>(Almansor, 1821)의 한 구절이다. 베를린 훔볼트대학 맞은편 광장에는 그 대학 동문인 하이네의 윗글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아래에서 곧 살펴보듯이, 나치 히틀러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책들을 '비(非)독일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불태우는 광기의 시대를 겪은 독일의 아픈 역사를 그 동판의 짧은 문장이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체화' 내세운 히틀러의 나팔수, 괴벨스
히틀러는 1933년 1월30일 권력을 잡자말자 독일 시민의 생각을 통제하려 했다. 이른바 일체화(Gleichschaltung, 동기화)란 명분 아래 정부 기관이나 주정부, 정당들을 나치당의 전체주의 이념(파시즘) 아래 하나로 묶어 나갔다. 그 광기의 흐름을 이끈 주요 작업자 가운데 하나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였다.
히틀러는 총리에 오른 지 딱 1개월 보름만인 3월13일 그의 '선전 나팔수'(정식 명칭은 '국민계몽 선전장관')로 괴벨스를 뽑았다. 독일의 언론과 예술 문화를 나치의 이념에 맞게 획일화하려 했던 괴벨스는 초기 나치 핵심 지도부 안에선 드물게 박사학위를 지닌 고학력자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학파에 속하는 독일 극작가 빌헬름 슈츠의 희곡 작품들에 대한 평론이 독일문헌학 박사논문의 주제였다.
괴벨스의 학위 논문에는 '운명', '민족', '애국심', '열광', '위대한 정신' 같은 감정적 개념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알고 보면, 나치 히틀러 정권이 숱하게 열었던 대규모 정치집회 때마다 히틀러나 괴벨스가 내뱉었던 어휘들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피가 절반 섞여 있었던) 지도교수는 그런 괴벨스의 논문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논문 관련 자료는 지금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보관돼 있다(랄프 로이트,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2017, 86쪽 참조).
▲ "그것은 단지 서막이었다. 책을 불태우는 그곳에서,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될 것이다." 베를린 훔볼트대학 맞은편 광장에 새겨진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 ⓒFjmust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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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명국가의 분서갱유
지난 글에서 "독일 대학생이 히틀러의 첨병"이라 했다(연재 82 참조). 히틀러와 괴벨스가 대학생들을 이용해 벌인 '일체화' 작업 가운데 하나가 '비독일적인 불온서적'들을 모아 불태운 사건이다. 독일 대학생의 극단적인 반유대 정서를 부추기면서 책을 태우는 야만적 광기를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었다.
1933년 5월10일 베를린을 비롯, 독일 대학들이 자리 잡은 34개 도시에서 2만 5,000권의 책들이 잿더미로 바뀌었다. 기원전 213년 중국 진나라 시절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떠올리는 '문화 폭력'이 20세기 문명국가임을 자랑하던 독일에서 벌어졌다. 이는 괴벨스가 만든 금서(禁書) 목록에 따라 나치당의 외곽 단체인 독일학생연합이 기획한 것이었다. 대학생들은 책들을 불 지르고 횃불 행진을 하면서 '조이베룽!'(Säuberung! 정화淨化)을 거듭 외쳤다.
나치의 공격을 받은 저자들은 나치 히틀러 정권이 못 마땅하게 여긴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유대계 지식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유대인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들도 함께 불탔다. '책을 불태우는 그곳에서,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될 것'이라는 하이네 작품 속 구절은 언젠가 독일에 나치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나타날 것을 내다본 경구(警句)나 다름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고 파시즘을 비판한 에리히 레마르크(1898-1970) 등 비유대인 독일작가들의 책도 불탔다.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개선문>으로 잘 알려진 반전주의 작가다(1931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1939년 미국으로 이주). 덤으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 유대인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에밀 졸라, '독일을 오염시키는 외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의 진보적 인권운동가 헬렌 켈러 등의 책도 불살라졌다.
토마스 만, 나치와 시오니즘 둘 다 비판
불태워진 책의 작가 명단에는 토마스 만(1875-1955)도 있었다.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베니스에서의 죽음> <토니오 크뢰거> <마의 산> 등 국내에도 번역이 돼 널리 읽혀진 독일의 소설가이자 평론가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1905년에 결혼한 그의 부인 카티아가 동화된(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 기업인 집안 출신이었다.
토마스 만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나치의 비이성적 광기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자, 위험을 느낀 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는 체코에 살았던 적은 없지만 체코 시민권과 여권을 지녔고, 1939년 체코가 독일에 병합되자 미국으로 옮겨갔다. 독일에 동화돼 살아온 유대인 부인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토마스 만은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펴던 일부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1931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오니즘이 유대 민족의 귀향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무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다수 유대인들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조국을 떠나 조상의 나라(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기에는 이미 현재 조국의 문화와 서양 문명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볼프강 벤츠, <유대인의 이미지와 역사> 푸른역사, 2005, 94쪽).
토마스 만을 비롯한 많은 독일 지식인들은 이미 유럽 백인사회에 뿌리 깊게 녹아들어간(동화된) 유대인들이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는 중동 땅으로 옮겨가는 것은 분쟁을 일으킬 뿐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도 같은 시각에서 (오스트리아 신문기자 출신의 테오도르 헤르츨이 중심이 돼 벌였던) 시오니즘 운동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유대인들 가운데 특히 지식수준이 높은 전문가 집단이 더욱 시오니즘에 부정적이었다. 이미 유럽 사회에 자리를 잡은 이들 '동화'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정통파들의 복식과 이런저런 금기를 부담스러워 했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다. 토마스만의 유대인 부인이 바로 그랬다. 히틀러 집권 뒤 유대인을 차별하고 옥죄는 반유대 법령이 잇달아 쏟아져 나오는데도 독일 유대인들이 독일을 일찍 떠나지 못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된다. 한국의 나치 연구자 송충기(공주대, 서양사)교수의 글을 보자.
[시오니즘에 대한 호소는 유대인들 사이에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특히 서구에서는 '성공한' 유대인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사회적 명망과 경제적 안락을 성취하여 유대교를 버리거나 기독교인들과 혼인하는 등 유럽사회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편견이 없는 땅에서 살기를 제아무리 바란다고 하더라도 누가 오랜 시간 어렵고 힘들게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나치의 만행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유대인들은 유럽에 그냥 눌러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송충기, <나치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 민음인, 2013, 41-42쪽).
▲ 1933년 5월10일 베를린 오페라광장 앞에서 ‘비독일적인 불온서적’들이 불타고 있다.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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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뒤 쏟아진 반유대 법령
'독일을 떠나기보다 그냥 눌러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은 엄청난 판단착오였음이 곧 드러났다. 지난 주 글에서 베를린 올림픽(1936년 8월)을 앞두고 나치 정권이 유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을 폈다는 사실을 살펴봤었다. 인종차별적 구호나 선전물을 걷어 들이고 유대인을 독일 대표선수로 뽑아 올림픽 경기에 내보내기도 했다. 그런 유화정책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베를린 올림픽이 막을 내리자 나치는 본심을 드러내고 다시금 유대인을 억눌렀다. 반유대 관련 법안들이 쏟아져 나았다. 잠시뿐이었던 기만적인 유화정책을 보면서 독일 바깥으로 도망칠 생각을 접었던 유대인들은 곧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연구자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글을 보자.
[1936년 10월에는 유대인 교사가 비유대인을 상대로 한 개인교습이 금지됐다. 그에 따라 (해직교사들은) 공직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된 뒤에도 가질 수 있었던 마지막 수입원을 잃게 됐다. 1937년 4월부터는 유대인들이 박사학위를 신청하는 것이 금지됐고, 1938년 7월엔 모든 유대인 의사들의 개업이 금지됐고 얼마 뒤 똑같은 운명이 법률관계자(변호사)나 다른 직업 집단에게 닥쳐왔다. 1938년 4월 모든 유대인들은 사유재산을 신고하도록 강요받았고, 5월엔 공공수주를 못 받게 했다. 7월엔 유대인을 구분하기 위한 식별 카드가 도입되더니, 8월에는 '사라'나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 티가 나는) 이름을 강제로 추가하는 법령이 발표됐다. 10월엔 'J'라는 붉은 글자가 유대인 여권에 찍히게 됐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38쪽).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38년 11월 유대인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가 없게 됐다. 열차와 대합실, 식당에서 일반 독일인과 함께 앉는 것도 금지됐다. 각종 공공장소에는 '유대인 사절'이란 알림판이 붙었고, 공원 벤치에는 '아리아 인만 사용하시오'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공공 수영장도 유대인은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인들을 멸시하면서 공원 입구에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을 붙여놓거나, 흑백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에서 흑인이 수영장을 못 쓰게 했던 어처구니없는 야만의 시절들을 떠올린다.
비엔나 도심을 청소한 유대인들
나치의 유대인 박해는 독일이 합병한 오스트리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를린 올림픽 5개월 전인 1938년 3월, 히틀러는 자신의 출생지였던 오스트리아를 독일 영토로 합쳤다. 핏줄(게르만족), 언어, 문화에서 차이가 없었기에 빠르게 이뤄졌다(1871년 비스마르크가 앞장서서 독일제국을 세울 때의 중심은 개신교를 믿는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이었고, 독일제국에 합류하지 않은 남부의 오스트리아는 가톨릭을 믿는 종교적 차이가 있긴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병합에 반대하는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었다. 독일군은 아무런 충돌 없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도나우 강변도시 린츠로 가서 주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금의환향'이란 말이 딱 맞는 귀향길로 여겼을 듯하다.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기고만장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유대인이 25만 명쯤 살고 있었다. 수도 빈(비엔나)에 몰려 살던 18만 유대인이 먼저 철퇴를 맞았다. 유대인 사업가들은 사업체를 빼앗겼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나치 행동대원들은 고급주택에 사는 유대인들을 내쫓고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다. 나치 돌격대(SA)에 붙잡힌 유대인들이 시내 포장도로를 조그만 솔로 청소하는 곤욕을 치른 것도 그 무렵 일이다. 무릎을 꿇고 솔질을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비엔나 시민들은 야유로 조롱을 퍼부었다.
오스트리아의 과격한 유대인 처리 방식은 독일의 나치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방식이 곧 나치당의 방식으로 채택됐다. 유대인 소유 기업체와 자산을 싼값에 아리안인(독일인)에게 넘기도록 압박했다. 기업의 아리안 화(化)는 선택사항이 아닌 의무가 됐다. 탐욕에 눈이 먼 독일 기업인들은 헐값에 유대인 소유 기업을 사들여 이득을 챙겼다. 그들은 사실상 히틀러의 공범이 됐다. 독일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학자인 라파엘 젤리히만이 히틀러 정권의 흥망을 분석한 책(Hitler: Die Deutschen und ihr Führer, 2004)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독일인들은 반유대적 조치들과 법률들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심지어 일부는 환영했다. 실제로 유대인 차별은 많은 독일인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유대인 상점과 의사와 변호사가 보이콧을 당하면, 사람들은 독일인의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독일인 변호사와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 관리들이 차지하고 있던 직위는 비유대인들에게 넘어갔다. 유대인 언론인과 경영진들의 빈자리도 마찬가지로 독일인들이 메웠다.](라파엘 젤리히만,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 210쪽).
유대인의 인권 탄압과 더불어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재산을 빼앗는 몰수조치가 잇따랐다. 이로써 독일 유대인이 실낱처럼 지녀온 '독일에 남고 싶다'는 희망은 베를린 올림픽 뒤 헛된 꿈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제서야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려 마음먹었지만, 이미 늦었다.
▲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나치 돌격대(SA)에 붙잡힌 유대인들이 시내 포장도로를 조그만 솔로 청소하는 곤욕을 치렀다.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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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난민 외면한 에비앙회의
1933년부터 히틀러 집권부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약 6년 동안 독일을 떠난 유대인은 20만 명에 이른다. 오스트리아에선 1938년 한 해 동안에 8만 2000명의 유대인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들 유대인 난민들이 가장 많이 간 곳은 미국(13만 2000명)이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5만 5000명, 영국에 4만 명, 남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2만 명, 중국 상하이에 9000명, 호주 7000명, 남아공 5000명 등이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91쪽 참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났던 유대인들이 처음 발길을 닿은 곳은 이웃 나라인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등이었다. 하지만 그곳 원주민들은 유대인을 반기지 않았다. 유럽 백인들의 오랜 반유대 정서에 더해서 1929년 대공황 이래 겪어온 경제 불황도 유대인을 환영하지 못한 배경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세금을 비롯한 여러 명목으로 히틀러 정권에 재산을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환영받질 못했다. 빈손이나 다름없는 빈털터리 유대인 이민자 집단을 따뜻이 맞아줄 나라는 없었다.
유대인 난민 문제가 국제사회의 긴장을 일으키자, 1938년 7월6일부터 프랑스 온천 지대인 에비앙에서 유대인 난민과 관련한 중요한 국제회의가 열렸다(프랑스 동부 알프스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레만호 남쪽에 자리한 에비앙은 '에비앙 생수'의 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앞장 서 열리게 된 이 국제회의에는 영국․프랑스․네델란드․벨기에․스위스․캐나다․아르헨티나 등 32개국 대표단과 난민 구호 단체의 대표들이 함께 했다.
9일 동안 이어졌던 에비앙회의의 초점은 유대인 난민에만 맞춰진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정치 난민을 다루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보자면, 회의는 국제사회의 위선을 드러내면서 유대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중미의 작은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을 뺀 모든 참가국이 난민을 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위선적 모습 보인 미국과 영국
회의에 대표단을 보낸 대부분의 국가들은 난민들이 몰려올 경우 자국 경제가 더 어려워질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그 밑바닥에 해묵은 반유대 정서가 깔려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회담의 유일한 성과라면 앞으로 난민 문제를 다룰 정부간 난민위원회(ICR)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뿐이었다. 유대인 연구자인 로버트 위스트리치(헤브루대, 근대유럽사)는 특히 미국의 위선적인 행태를 비판한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일은 미국과 영국조차 유대인 난민의 상당수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던 점이다. 실제로 주최국이었던 미국이 일단 자국의 문호를 개방하기를 꺼려하고 있음을 밝히자, 에비앙회의는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계획은 미 국무부가 자국으로 향하는 난민들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자국의 이민법을 자유화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에 앞질러 선수를 치려는 수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101쪽).
위스트리치는 미국에 못지않게 영국도 위선적이고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에비앙회의가 열릴 당시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를 반대하는 중동 아랍인들의 무장봉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연재 80 참조). 그렇기에 유대인 난민들에게 팔레스타인 이주 길을 더 넓힐 뜻이 없었다.
[영국 외무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나치 정부에 대한 비난도 원천적으로 삼갔다. 영국 대표단은 동아프리카 식민지에 약간의 난민이라도 정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겠다고 애매하게 약속했지만, 결국 재원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했다.](로버트 위스트리치, 101쪽).
미국 안의 반유대 정서
1930년대 미 정치권에서는 고립주의와 반유대 정서가 강했다. 다수의 미 의회 의원들과 국무부 관리들도 그러했다. 에비앙회의 7개월 전인 1939년 2월 미 뉴욕주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앞으로 2년 동안 2만 명의 유대인 난민 어린이들을 받아들이자'는 법안을 상원에 내놓았다. 5일 뒤 매사추세츠주 출신 하원의원 에디스 로저스가 같은 내용의 법안을 하원에 내놓았다. 이 법안들을 두고 몇 개월 동안이나 논쟁이 벌어졌다. 반대하는 쪽에선 "미국의 가난한 어린이들이 받을 지원을 유대인 난민 어린이들이 빼앗아 갈 것이다"라며 목청을 높였다. 끝내 법안은 통과하지 못하고 휴지통에 버려졌다. 영국 저널리스트 폴 존슨의 글을 보자.
[미국은 유대인 난민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겨우 2만 1,000명밖에는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수치는 법률로 정한 이민 할당 인원의 10%밖에 되지 않았다.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향군인회부터 해외종군군인회까지 애국단체들은 이민 전면 금지를 요구했다. 미국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만큼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해진 때도 없다. 1942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은 유대인 집단을 일본인과 독일인 다음으로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여겼다. 일례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뉴욕 워싱턴하이츠에서 모든 유대인 회당이 훼손당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845쪽).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비극 가운데 하나가 세인트루이스호 사건이다. 1939년 5월 대서양 횡단 독일 여객선 세인트루이스호는 어렵사리 나치 정권의 출국 허가를 받은 유대인 난민 930명을 태우고 함부르크 항을 떠났다. 2주간의 항해 끝에 쿠바 아바나 항구에 닿았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한 유대인은 절망한 나머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28명의 유대인은 돈을 더 내고 아바나 항에 내렸다).
세인트루이스호는 미국 플로리다로 향했지만 마찬가지로 입국허가를 받질 못했다. 캐나다로부터도 거부당한 배는 끝내 유럽 벨기에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미 유대인 단체들이 바삐 움직인 끝에 영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4개국이 나눠 받아들이기로 했다. 벨기에 앤트워프 항에 내린 유대인들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국으로 간 287명을 뺀 나머지는 서유럽이 독일군 점령 아래 들어가면서 다시금 살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들 가운데 254명은 홀로코스트 희생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에도 유럽의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미국 안의 반유대 정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뒤까지 이어졌다.
개인적인 경험담 하나. 2001년 9.11테러 무렵 필자는 미 뉴욕 맨해튼에서 뒤늦게 국제관계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웃집에 유대인 할머니가 살았다. 교육학 박사 학위를 지닌 그는 필자가 학교에 내야할 영문 리포트의 서툴고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주었다. 그의 말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맨해튼에서 셋집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여러 번 퇴짜를 맞은 끝에 유대인임을 숨기고 아파트 임대차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어떤 이유로든 유대인을 흉보거나 트집을 잡았다가는 '반유대주의자'(antisemitist)로 몰려 법정으로 가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유대인 눈치를 보며 말조심하는 세상이 됐다. 정치권과 금융권, 신문 방송 등 언론계, 학계에서 유대인 파워는 엄청나게 크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4만 명 넘는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미국의 제도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일 것이다.
▲ 1938년 7월 난민 문제를 다루는 에비앙회의에서 미국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 난민 수용에 인색한 미국의 위선을 비웃었다.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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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의 위선 간파한 히틀러
미국을 비롯한 에비앙회의 참가국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들 자국으로 향하려는 유대인 난민을 다른 나라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나치 독일의 반유대정책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유대인 문제를 '독일 국내문제'로 넘기려는 모습이었다. 회의를 멀리서 지켜보던 히틀러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히틀러의 경멸에 찬 반응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히틀러는 '이들 범죄자들'(유대인)을 걱정하는 척하는 서구 민주주의(특히 미국과 영국)의 (속이 뻔히 내다보이는) 인간적인 면모를 비웃었다.](로버트 위스트리치, 102쪽)
위 인용문에서 '인간적인 면모'라 했지만, 보다 정확히는 '인간적인 위선'이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가 보기에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유대민족에 대해 동정심을 보이다가도 막상 그들을 도와야 할 때 냉정하게 못 본 체 했다. 히틀러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위선을 제대로 봤다. 위스트리치는 "실제로 나치 지도부가 에비앙회의를 지켜보며 얻은 것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책을 점차 더 가혹하게 실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란 확신"이라 풀이했다.
독일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영미권의 위선과 미지근한 대응은 히틀러에게 더욱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에비앙회의 4개월 뒤인 1938년 11월 초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 외교관이 유대인 청년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터지자, 이를 빌미로 삼아 광기 어린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상점과 시너고그(유대교 예배당)이 부서지거나 불탔다. 깨진 유리창이 길바닥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이른바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독일 유대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유혈사태를 가리켜 연구자들은 (대규모 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에 앞서 일어난 포그롬(pogrom, 소규모 학살)이라 부른다. 나치 행동대원들을 부추겨 '수정의 밤' 포그롬을 사실상 지휘했던 이가 히틀러의 '나팔수' 괴벨스였다. 그래서 '괴벨스 포그롬'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괴벨스는 1933년엔 서적을 불태웠지만, 1938년엔 사람들을 죽였다. 다음 주엔 '괴벨스 포그롬'과 문제점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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