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영감을 얻을까 해서 책을 든 건 아니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심심하면 인문학 고전이나 대중과학서를 읽던 그는 호모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를 담은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를 좋아했다. 해박한 과학 지식에 상상력까지 출중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라니. 이번 책에서는 어떤 상상력을 보여줄까. 그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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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편을 쓰고 있던 4년 전쯤, 소설가 정유정은 우연히 유발 하라리의 책 『호모 데우스』를 집어 들었다. 책 후반부에 인간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 현재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들이 수많은 빅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다. 읽는 내내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두세 번 거듭해 읽었다.
모든 이들이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과연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욕망이 뭘까. 인간은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살까.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에서) 남는 욕망이 하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놀이를 배우고 즐기며 죽을 때까지도 놀이를 하다가 죽는 놀이의 동물, 유희의 동물입니다. 바로 서사 놀이죠. 드라마, 연극, 영화, 소설 등등. 인간들에게 가상 세계에서 서사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어떤 극장을 만들어주고 긴 세월을 보내게 한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롤라라는 개념이 생겨났죠.”
이런 세상을 한번 써볼까. 여러 상상을 하다가 소설이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는 장편소설 『완전한 행복』을 한창 집필 중이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단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메모만 해놓았다.
『완전한 행복』을 출간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취재에 나섰다. 특히 주인공의 내면과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서 거대한 유빙에 포위된 홋카이도의 아바시리 바다와, 태초에는 바다였지만 황량하고 메마른 모래땅이 된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을 다녀오기도 했다.
소설가 정유정이 현재와 약 10만 년 뒤의 시공간을 교차하면서 운명에 맞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분투와 자유의지를 SF(과학소설)적으로 그린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를 들고 돌아왔다. 장편 『완전한 행복』 이후 3년 만이다.
소설은 삼애원을 중심으로 한 핍진한 현재와, 발칙한 10만년 뒤 ‘롤라’의 세계라는 시공간을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10만년 뒤의 배경인 롤라의 세계는 빛나는 가상들이 만나서 현실을 이루는 미래 공간이다.
“나는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머뭇대지 않고 출발했다. 부르면 찾아가는 게 내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 어둡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고. 이정표가 알려주기로, 이 거리의 이름은 만경로란다.”(9쪽)
인간의 욕망을 구현해내는 1인칭 가상 극장 ‘드림 시어터’의 프로그래밍 기술자인 해상은 기이한 의뢰를 받고 롤라의 세계에서 경주를 만난다. 제이를 만나 사랑하게 된 바하리야 사막을 꿈꾸는 해상은 경주의 드림 씨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경주로부터 노숙자 재활시설 삼애원 이야기를 듣는다.
의료 사고로 직장을 잃은 데 이어 동생마저 잃은 도수치료사 경주는 삼애원 보안요원으로 취직한다. 영원한 천국이 완성됐다는 소문과 노숙자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주는 삼애원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을 만나고, 특히 함께 보안요원으로 입사한 제이가 노숙자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비밀리에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어마무시하게 돈이 많은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아니다, 죽지 않은 게 아니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종이 된다지, 아마.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는데, 내 생각엔 그 정도면 신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신이야. 아무튼 그 회사가 세계 최고의 게임회사와 손을 잡고 신들이 거처할 세상을 만들었다 이거야.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병든 자도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영원한 천국.”(106쪽)
경주는 삼애원에서 끝난 35세 이후를 백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해상은 그러면 드림 씨어터를 만들 수 없다며 3년 동안의 행적을 거듭 요구한다. 경주는 그렇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버틴다. 롤라행 티켓을 놓고 찾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삼애원 복마전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마침내 미래의 해상과 경주, 현재의 경주와 제이 등의 관계와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하는데.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해할 만한 실마리라도 찾지 않았을까.’ 그 이해가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내겐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요.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390쪽)
‘아마존 여전사’ 같은 작가 정유정은 왜 10만 년 뒤의 미래와 천국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그가 그린 미래와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 작가를 지난달 28일 서울 합정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만났다.
―이번 작품 집필을 위해서 홋카이도의 아바시리와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을 다녀왔는데.
“경주의 내면은 홋카이도 유빙지대라고 생각했다. 유빙들이 균열돼 떠다니는 깊은 어두운 심연이랄까. 경주의 정체성에 맞는 장소로 가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유빙지대에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져서 홋카이도로 바꿨다. 홋카이도 항구 아바시리에서 쇄빙선을 타고 유빙을 바라봤다. 수평선까지 유빙이 떠내려 와서 서로 부딪히고 엉겨 붙었다.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쇄빙선이 얼음을 갈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유빙끼리 쾅쾅 부딪혔다. 만약에 저 유빙 사이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홋카이도를 다녀온 뒤 삼애원의 공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반면 해상의 정체성은 사막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를 잃고 흔적만 가진, 의식만 있고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사막은 태초의 생명체를 품었던 바다가 많았다. 처음 제이와 해상은 연인이 아니라 남매로 구상했는데, 케미가 살지 않아서 캐릭터와 스토리를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침 『종의 기원』이 번역 출간된 이집트에서 행사 요청이 왔다. 행사를 소화하고 바하리야 사막으로 갔다. 처음에는 『어린 왕자』의 바하리야 사막을 생각했다. 지난해 9월, 모랫바닥에서 매트리스 하나만 깔고 보냈다. 유성우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땅에는 밤안개가 깔려 있고, 여우는 자박자박 소리를 내고 다가왔다. 밤안개가 낀 어둠 속에서 여우의 눈과 마주쳤다. 몸이 얼어붙었고, 그 순간 제이와 해상은 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하리야 사막에서 돌아와서 해상과 제이를 연인으로 바꾸자 이야기와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이전에 쓴 것을 버리고 다시 썼다. 그렇게 3년이 걸렸다.”
―왜 100년이나 1000년 뒤가 아닌 10만 년 뒤의 미래였을까.
“우선 개인적으로 과학에 대해서 좀 비관적이다. 과학은 후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학 발달은 인류의 절멸 또는 지구상에 생물체 절멸을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AI나 딥러닝 등 기술이 계속 이렇게 가도 좋은가, 과학이 이대로 가도 좋은가. 지금 어떤 사회적 담론도 형성되지 않은 채 대중에게 소화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된다면, 결국 인류는 자신이 만든 과학에 의해 죽지 않을까. 인류가 지구상에서 절멸하고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10만 년 뒤쯤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간의 절멸을 염두에 두고 좀 더 길게 본 것이다.”
―룰라의 세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상상했는지.
“인류가 절멸된 이후 살아남는 이들은 데이터 인간일 것으로 봤다. 다만 전체 인류가 데이터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한정된 소수의 인류만 슈퍼컴퓨터 안에서 하나의 우주를 만들 것이다. 그것이 롤라다. 데이터 인간들은 국가를 만들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사랑했던 장소나 편안한 장소를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주는 만경로를, 해상은 제이와 만났던 바하리야 사막을 각각 자신들의 가상공간으로 택한다. 자신의 세계 한쪽을 열어주면 다른 사람이 그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정했다. 불교의 윤회사상도 녹아 있다. 예를 들면, 2020년대에 롤라의 세계에 들어온 해상은 그때 이후 여우를 비롯해 온갖 동물이 돼 가상 세계를 돌아다닌다.”
―현재에선 롤라행 티켓을 놓고 잇단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롤라행 티켓 다섯 장이 노숙자에게 무작위로 뿌려졌다. 티켓은 유심 형태로 심어져 있어서 유심을 놓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 번의 노숙자 연쇄 살인이 일어나면서 유심 3개가 사라지는데, 두 개는 삼애원에 있고 하나는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경주부터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다.
“경주는 전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때부터 있던 캐릭터를 고스란히 안고 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수명이가 성장해 경주가 됐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며, 밖으로 말을 안 해도 속으로 엄청 깐쭉대고, 찌질하다. 그럼에도 자기 앞에 어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이 닥쳐왔을 때도 기어코 이겨보겠다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제이의 경우 모든 것이 완벽한 유니콘 같은 캐릭터다. 결핍이 없고 완벽한 사람은 소설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제이의 결핍은 연인 해상의 시한부 삶이다. 『내 심장을 싸라』의 승민이처럼,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해상의 연인으로 등장하고 경주의 성장을 도와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자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키고 호감을 주기 위해 행동과 얼굴이 돋보이도록 했다. (주인공 외에도 공을 많이 들인 인물은) 개인적으로 제일 애정을 가지고 만든 캐릭터는 앵무새 공달이다. 앵무새라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한다. 귀엽기도 하고. 해상과 경주 두 주인공 외에는 모두 3인칭이어서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인물 구축에 더 신경 썼다. 한기준 팀장은 전작 『진이, 지니』나 『28』에 나왔던 한기준 구조대원이 소방서에서 퇴직하고 나온 뒤에 세 번째 출연한 인물이다. 경주는 한기준에게 형처럼 어떤 안정감을 느낀다. 칼잡이의 경우 양아치 말투나 욕설, 건들건들하는 행동 등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 위해서 교도소에 다녀온 깍두기 오빠가 하는 유튜브를 보면서 관찰했다. 아무 데나 침을 탁 뱉거나 담배를 질근질근 씻는 모습 등을 보고 혼자 연습하기도 했다. 남편이 이런 모습을 보고 양아치가 다 됐네, 라고 하더라(웃음). 특히 경주가 칼잡이의 허리띠를 확 잡아당겨 기선을 제압하는 장면의 경우 유튜브를 참고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
“태초부터 인류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어떤 야성, 그러니까 불행과 고통을 견디고 맞서고 그것을 끝내 이겨내려고 하는 욕망, 야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야성이야말로 처음 사바나에서 하찮은 존재였던 호모 사피엔스를 이 지구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사바나 조상들이 우리한테 물려준 야성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면서 사회적 규범이라든가 문명에 길이 들어서, 이른바 ‘가축화’돼, 무의식 속에 잠들게 됐다. 삶은 행복할 때보다 고통스럽고 좌절할 때가 더 많다. 좌절감이 클 때 무의식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야성의 힘을 깨워서 맞서야 한다. 마지막까지 남을 인간의 욕망은 바로 야성이다. 결국 『내 심장을 쏴라』 때부터 계속 이야기해 온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닿는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천국은 가능할까.
“저는 천국이 되게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롤라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지루하면 맨날 가상 극장에 들어가겠는가. 가상극장도 몇 번 살다 보면 지칠 것 같다. 행복도 마약처럼 계속 역치가 높아진다. 한 생애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야 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현상이 있는데, 고탄수화물을 소비하다가 원래로 리셋하려면 몇 달 동안 고통스러울 정도로 식이 요법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 인간 행복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부족하고 결핍할 때 그것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욕망하다가 그것을 갖게 되면 인생이 지루해지고 다시 결핍을 느끼게 된다. 천국에 가보면 처음 얼마간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다음 생에 천국에 가는 것을 꿈꾸는 것보다 이생에서 삶의 가치를 찾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그린 작품이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 네 작품이고,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성취를 그린 작품이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에 이어 이번 『영원한 천국』까지 네 작품이다. 파괴적 욕망을 쓰는 ‘무서운 언니’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린 ‘다정한 그녀’가 4대 4가 된 것이다(웃음). 파괴적 욕망을 그린 소설들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해서 제 자신도 고통스럽고 피폐해진다. 『완전한 행복』을 쓰고 난 뒤 좀 피폐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도 생기기도 했다. 이번에는 성취적 욕망을 가진 밝은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이야기 자체는 스릴러도 있고, 제 색깔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서 제 소설 가운데 상대적으로 희망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다정한 그녀 계열에 속하는 소설이다. 제 소설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가 큰 소설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이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면, 이번 작품은 가장 멀리까지 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소설을 읽고 20~30대 독자들이 연애 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은 짧으니까.”
함평읍내 5일장 한켠에 임시로 설치된 무대의 장막 앞에서 일단의 어른이 마치 만병통치약 같은 ‘호령고’를 팔고 있었다. 호령고를 하나 이상 사야 서커스 공연이 열리는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호령고를 2개나 사면서, 그는 할머니 손을 잡고 당당하게 장막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장막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옆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 가족 손을 잡고 입장한 읍내 아이들까지.
시골 장터를 순회하던 서커스단은 이날 여러 공연을 선뵀다. 무대에 누워서 발로 통도 굴리고, 접시도 돌리고, 모자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중간 중간 약장수가 나와 약을 팔기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정유정에게 서커스단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만담이었다. 한복을 입고 갓을 쓴 만담꾼들이 나와서 들려준 흥부전이었다.
“권선징악의 흥부전을 되게 재미없고 따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만담꾼들이 들려주는 흥부전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하고 착한 흥부가 아니었거든요. 너무 게을러서 낮에는 낮잠만 자고, 반대로 밤에만 너무 부지런해 아이를 무려 11명이나 낳았다고 꼬집더라고요. 전라도식의 질펀한 만담을 했죠.”
“모두 공터에 모여 봐!” 해질 무렵, 읍내 5일장에서 서커스단 공연을 보고 온 정유정은 동네 아이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곧 대여섯 명이 모였다. 서커스단에서 본 흥부전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흥부전 만담에 빠져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나 대사뿐만 아니라 동작까지도 머릿속에 모두 넣어둔 그였다. 수수강을 이용해 흉내를 내면서 흥부전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이들은 모두 꼴까닥 하고 넘어갔다. 그가 처음으로 아이들의 ‘대스타’가 된 날, “완전히 깃발을 날리는 날”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때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해맑은 소녀가 이야기의 힘, 매력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어머니에게 책을 사달라고 졸라서, 열심히 읽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자연스럽게 문장도 좋아져 글쓰기 대회에서 자주 수상했다. 어느 순간, 작가의 꿈이 피어올랐다. 지금은 능력이 없지만, 나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직접 써서 들려줘야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돼야지. 소설가 정유정의 원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가 아닌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남편에 기대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직업을 가지고 네 인생을 살아라.” 어머니의 당부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보훈병원에서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직원으로 9년을 일했다. 결혼 직전, 그는 남편에게 집을 사게 되면 작가를 하겠노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 친구들의 소설 숙제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직장에 다닐 때에도 홀로 무수히 습작을 하며 창작의 갈증을 풀어온 그였다.
“나, 이제 직장 그만 다닐 거야.” 집을 마련한 2001년 5월, 그는 간호사 일을 그만 두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평소 돈 관리를 맡아온 남편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담배를 피우고 오는지, 잠시 자리를 비운 남편이 돌아오더니 말했다. “그래, 해봐!”
그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안에 세워진 종탑은 두 가지. 신나는 모험 이야기, 겁나는 심리 스릴러. 마치 고시생처럼, 하루 종일 집에서 쓰고 또 썼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오후 5시까지 12시간의 글쓰기 노동. 이때 지금의 글쓰기 루틴이 확립됐다. 그럼에도 등단은 쉽지 않았다. 6년 동안 장편 공모전에 무려 11번이나 떨어졌다. 많은 낙선과 좌절은 그를 떠받드는 자세로 글을 쓰고 문학을 하도록 단련시켰고, 마침내 아마존 여전사로 만들어줬다.
1966년 함평에서 태어난 정유정은 2007년 낯선 세상으로 뛰어든 청소년들이 펼치는 파란만장한 여행을 담은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년 뒤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연속으로 거머쥐며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진이, 지니』, 『완전한 행복』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 사이 작품은 영미권은 물론 유럽과 중국 등 해외 22개국에서 번역 출간됐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순문학과 장르문학 사이를 질주하는 작품 세계를 보인다는 평이 있는데.
“당선됐을 때 선이 굵은 서사라고 호평도 받고 영화 판권도 팔리며 관심을 받았는데, 다음 소설은, 되든지 안되든지,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작가들이 일상에서 비범한 이야기를 끌어내지만, 저의 경우 대중의 정서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소설, 예를 들면 철학적 이야기나 힐링 소설 등에는 흥미가 없었다. 많은 이들에게 운명이 뒤바뀌는 몇 번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는데, 최선이 아닌 최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 사람에 관심이 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선택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파멸했든지 소중한 것이 잃었든지 등등. 그래서 『7년의 밤』을 썼다. 주인공은 최악의 선택을 했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지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아들을 지켰다. 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쓰려면 가장 적합한 장르가 스릴러였다. 추리 소설은 범인 찾기가 주제로 독자의 지성에 호소하지만, 스릴러의 경우 생존이 목적이기 때문에 범인을 다 보여줘도 상관없고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서스펜스가 주를 이룬다. 제가 쓰고 싶었던, 자기 외부에서 어떤 폭력적인 힘과 맞닥뜨렸을 때, 최악을 선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형식이 스릴러였다. 여기에 주제 의식도 있어야 하고, 메시지도 있어야 한다. 적어도 문학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 것을 구축하기 위해선 문장력이 있어야 하고, 짧고 속도감도 있어야 한다. 제가 택한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버리는 대신 정확성과 간결성, 속도감이었다. 미학적인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정확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택했다. 결국 문학적인 주제의식이나 문체를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스릴러 형식을 차용하기 때문에 스릴러를 잘 쓰는 작가라 하는 것 같다. 취향 때문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부합하기 때문에 실용적으로 스릴러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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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인물 입장에서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양아치가 못을 박을 때 망치로 못이 아닌 자신의 손을 때렸다면 그때 튀어나오는 말은 뭘까. 매우 아팠을테니 아 씨발, 일 것이다. 그런데 독자가 작가를 상스럽게 볼까봐 어머나, 라고 하면 거짓이 된다. 독자가 작가를 상스럽게 보든지 말든지 양아치의 입장에선, 인물 입장에선 아 씨발, 이 맞다. 설령 독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인물이나 스토리 입장에서 가장 진실에 접근하는 게 무엇인가를 찾아내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 인물이 아무리 사악하고 치졸하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의 입장에서 가장 큰 진실, 자기 합리화나 위선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작가가 끼어들어 포장을 하거나 진실을 가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스토리 역시 스토리의 논리로 가야 한다.”
―어떤 작가로,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수도 없이 말했지만, 이야기꾼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장래 희망 역시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차기작 계획은) 이번에 『영원한 천국』을 써서, 다음 소설은 다시 무서운 소설, 센 언니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어떤 장르적 실험을 해보려고 한다.”
요즘 “잠이 조금 늘어서” ‘무려’ 새벽 5시쯤 일어난다고, 소설가 정유정은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선, 메탈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깨운다. 먼저 진도가 나가는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진도 나간 원고를 다시 수정한다. 오후 5시가 되면, 방문을 닫고 운동하러 나간다. 한 시간은 유산소 운동, 또 한 시간은 근력 운동. 돌아오면 씻고, 술 한 잔 마시고, 잔다.
예전 조깅을 했던 그는 요즘에는 달리기를 한다. 혼자 계획을 세워서 거리도 조금씩 늘리고 속도도 끌어올리고 있다. 잘 되면 내년 가을쯤에 하프 마라톤에 나갈 생각이다. 최종 목적은 트레일 러닝.
소설을 쓰지 않을 때조차도 책상에 앉아 읽고 노트 필기를 한다. 가급적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려고 애쓴다. 장편소설의 흐름이 끊길 수 있기 때문에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마존 여전사 같은 루틴 속에서, 마침내 그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을 탈주를 시도하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 되고, 희대의 살인마 아들이 돼 악몽처럼 세령호 주위를 배회하며, 마침내 청춘 남녀가 돼 밤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여우를 맞으러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으로⋯.
“녀석은 알레가 던져둔 포도를 주워 먹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귀를 바짝 세우고 눈을 까맣게 빛내며 우리를 봤다. 그때, 녀석과 눈을 맞대던 바로 그때 나는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였다. 처음엔 녀석이 내는 소리인가 했다.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아마도 살고 싶어 하는 내 욕망이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너무나 명백해서 어찌해볼 여지가 없는 내 운명에 대한 분노의 소리였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짤막한 숨을 연달아 뱉어냈다. 숨이 가빴다. 그동안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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