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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김상철의 퍼스펙티브] 패자부활전 가능하도록 ‘소득 이동 사다리’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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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복지 모델의 모색



중앙일보

김상철 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서울시복지재단 대표


한국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이 “빈곤으로부터 ‘위대한 탈출’을 성공한 대표적 국가”로 평가했듯이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다. 최근 세계은행(WB)이 발간한 2024년 세계개발보고서에서는 한국을 중진국 함정을 극복한 ‘성장 슈퍼스타’라고 소개했다.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은 경제성장 성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아왔지만, 최근에는 후한 평가도 나오고 있다. 작년 서울시복지재단 창립 20주년 행사에 참여한 독일 브레멘 대학 필립 마누 교수는 20세기 후반에 선진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ACD) 그룹에 진입한 대표적 사례로 한국을 상찬했다. 한국은 복지국가의 성장이 늦게 일어나긴 했지만, 수출주도형 성장 모형을 성공시키면서 보편적·안정적 복지를 동시에 달성한 예외적인 국가라는 것이다. 이 점은 수입대체형 산업화 개발 전략이 복지국가 성장의 저해를 가져온 남미국가와는 다른 부분이다.



복지 수급자 늘어났지만 사각지대 놓인 빈곤층은 아직도 많아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보다 더 포괄적·안정적 소득보장제도 필요

중·저소득층 빈곤 탈출 위해 사회서비스 및 직업교육 연계해야

기본소득, 시민을 책임 있는 주권자에서 단순 소비자로 전락시켜

외환위기로 관심 높아진 복지안전망

중앙일보

고도성장과 함께 실질임금이 상승하면서 소득 불평등도 1980년대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감소했다. 그런데 1997년의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한국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기업의 부도와 대량 실직은 중산층의 붕괴를 가져왔다. 소득 및 자산의 불평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등 사회경제적 양극화도 심해졌다. 이는 국민 통합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이 바람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까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IMF 외환위기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국민 의식을 높였다. 이는 2000년 최저생계보장을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의 계기가 됐다.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소득보장제도는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꾸준히 확충됐다. 2006년 위기 상황에 부닥친 저소득 가구를 대상으로 긴급복지지원제도가 도입되었고, 2009년에는 한국형 EITC(Earned Income Tax Credit) 제도인 근로장려금이 실시됐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사회보장급여법이 제정됐고, 같은 해에 기초연금법이 시행됐다. 2015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생계·의료·주거·교육급여의 4가지 형태로 구성되는 맞춤형 급여체계로 개편됐다. 2020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20년 만에 25~64세 수급자는 생계급여 근로소득의 30% 공제를 적용했고, 2021년 10월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됐다. 2021년 1월 1일부터는 한국형 실업부조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가 도입됐다. 2024년부터는 생계급여 선정기준이 기준중위소득의 30%에서 32%로 인상됐고, 향후 35%까지 인상될 예정이다.

사각지대 빈곤층 여전히 많아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한국사회의 소득 불평등은 실제로 지난 10여 년간 어느 정도 변화했는가는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소득 불평등이 낮고 1에 가까울수록 소득 불평등이 높음)와 소득 5분위 배율(소득 상위 20%의 평균소득을 하위 20% 평균소득으로 나눈 수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할 경우 두 지표 모두 2011년부터 2022년까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는 정부의 재분배 정책에 의한 소득 불평등 개선 노력이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과 주요 국가들의 지니계수(2021년 처분가능소득 기준)를 비교하면, 한국(0.333)은 미국(0.375), 영국(0.354)보다는 낮고, 스웨덴(0.286), 캐나다(0.292)보다는 높다. 문제는 국민들이 우리나라 소득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세계불평등연구소(WIL)의 ‘1933~2022년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라는 보고서도 최근 30년간 소득 불평등이 악화하여 현재는 1930년대 식민지 시절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련의 제도 개선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규모는 늘어났으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층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기준중위소득 50% 이하 빈곤층은 2021년 기준 291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비수급 빈곤층은 2021년 기준 66만 명에 이르고, 차상위를 포함하면 125만 명 수준에 달한다. 과거보다 비수급 빈곤층이 감소하고 있지만, 근로빈곤층 지원 비율은 2022년 기준으로 20~39세는 1.8%, 40~64세는 3.9%에 불과했다(김태완·한수진, 2023).

새로운 사회적 약자의 등장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한편으로 산업구조 재편, 기술 발달, 가족해체 같은 사회구조적 변화나 코로나19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의 등장으로 실직자, 불완전고용 노동자, 과다부채 가구, 가족돌봄청년, 고립·은둔청년 등 새로운 약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가운데는 소득 위기 가구인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여전하다. 기준중위소득 75% 이하를 대상으로 하는 긴급복지지원제도와 한국형 실업 부조를 표방한 고용노동부의 국민취업지원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조건이 까다롭고 급여 수준도 제한적이어서 위기 가구 보호에는 한계가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사각지대 빈곤층 해소, 양극화 완화, 경제적 이유로 인한 고립 및 고독사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소득보장제도가 절실해졌다. 현재 기준중위소득 32%(2024년 기준) 이하만을 지원하는 제도보다 더 포괄적이고 안정적인 소득보장제도가 필요해진 것이다.

새로운 소득보장제도가 추구해야 할 핵심 과제는 취약계층의 사각지대 해소와 함께 중·저소득층이 빈곤을 탈출해 상향 이동할 수 있는 ‘소득이동 사다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는 패자부활전이 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득보장에 사회서비스와 직업교육을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보다 적극적인 소득보장제도로서의 역할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자활사업 대상인 ‘근로능력 있는 수급자’의 절대적 규모와 비율이 모두 감소하고 있다. 2013년 12월에는 전체 수급자의 25.6%가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았지만(32만2000명), 2024년 7월에는 13.9%(23만7000명) 만이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았다. 현행 수급자의 대부분이 고령이거나 건강 때문에 근로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로 유인을 기준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서울시 ‘디딤돌소득’ 실험 주목

새로운 소득보장제도는 기존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중·저소득층을 대거 포함해야 한다. 이들 중·저소득층은 극빈층보다 청년·중장년 인구가 많고, 근로 활동을 하는 비율도 높다. 만약 근로 능력이 있는 수급자가 질병으로 근로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집에 있어서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돌봄서비스를, 적절한 일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직업교육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소득보장을 통한 직접적인 근로유인 효과는 장기적인 관찰이 필요한 사항이지만, 근로 의지가 있는 수급자에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주어야 시너지 효과를 올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서울시에서 하는 디딤돌소득(옛 안심소득) 실험이 주목된다. 이 제도는 기존 제도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뿐만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약자를 포괄하면서 일하는 근로빈곤층을 위한 소득안전망으로도 기능할 수 있는 포용적이고 관대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실현 가능성 없는 기본소득 제도

최근 코로나 팬데믹의 확산과 인공지능(AI) 자동화를 계기로 일자리 없는 미래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핀란드를 방문하여 만난 헬싱키 대학의 힐라모 교수는 핀란드와 독일과 같은 복지선진국에서는 기본소득이 더 이상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기본소득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지급수준이 충분하지 않은 ‘부분기본소득’이 도입되더라도 국가의 재정에는 막대한 부담을 초래할 위험이 있고, 기존의 비수급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도 없다. 또한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시민은 노동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고, 민주주의의 책임 있는 주권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근로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이들 시민은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외 계층의 사회적 고립은 더욱 가속화되고, 나아가 사회적 유대까지 상실하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자신의 존재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윤리적 삶의 기준점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고립·고독과 같은 새로운 위험의 해결을 위해 기존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중심으로 짜인 소득보장체계는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진화론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존의 복잡한 개별 복지제도를 보다 간단한 제도로 재구조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복지 수급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효과도 현저하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김상철 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서울시복지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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