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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K아트의 힘은 컬렉션에서 나온다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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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미술에 대한 한국인 일반의 관심과 태도에 드라마틱한 전환을 가져온 두 사건이 지난 3년간 벌어졌다. 하나는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2021년 고인의 방대한 문화예술 컬렉션 중 2만30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한 것과 그 ‘이건희 컬렉션’의 3년에 걸친 지역 순회 전시다. 순회전 대미를 장식하는 국립춘천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시가 지난 11일 시작했다. 내년 말에는 해외 순회전이 시작될 예정이다.

문화 후원과 차익 욕구 섞인 컬렉션

또 하나의 사건은 세계 2대 아트페어 프랜차이즈인 런던 기반의 프리즈가 한국화랑협회의 키아프와 협업해 ‘프리즈 서울’을 2022년부터 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주말 폐막한 제3회 프리즈 서울은 이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모습이었다. 1회 때처럼 초고가 대작이 나오고 불티나게 팔리는 일은 없었으나, 퀄리티 있고 실속 있는 작품들이 나와 온건한 판매 실적을 보여서 세계적 경기 침체에도 선방했다는 평이다. ‘키아프 서울’ 역시 프리즈와의 선의의 경쟁으로 퀄리티가 좋아졌다는 평이 많다. 무엇보다도 관람객들의 진지한 관심과 함께 높은 비중을 차지한 젊은 관람객을 평가하는 해외 갤러리들이 많다. 이미 포화 시장인 서구는 물론이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한국의 컬렉팅 문화가 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지난 6일 새로 한국에 진출한 독일 명문 갤러리 마이어리거 대표들의 말).



이건희 컬렉션과 프리즈 서울

컬렉팅 문화 획기적 변화 계기

당당한 젊은 컬렉터들 성장 중

물납제 확대 등 제도 개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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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폐막한 제3회 프리즈 서울에서 관람객들이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이의 작품을 보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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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 이건희 컬렉션과 프리즈 서울이 한국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컬렉팅 문화의 성장’이다. 그간 컬렉팅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은 ‘문화유산’ 즉 고미술·유물의 수집과 현대미술의 수집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막대한 사재를 털어 국보급 유물들을 사들여 그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은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지난 2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에도 관람객이 쇄도하며 간송의 ‘문화보국(文化保國·문화로 나라를 지킨다)’ 정신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 수집과 관련해서는, 그게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라도, 관련 기사에 늘 “자기들도 이해 못 하는 작품을 사서 허세 부린다” “부자들만의 재테크나 세금 회피 수단 아닌가”라는 악플이 주를 이뤘다. 그 현대미술 작품들도, 심지어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미래에 한국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철저히 배제된 채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꾼 것이 바로 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이 섞인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과 전시였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컬렉팅에는 예술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소장품의 전시 대여나 미술관 건립을 통해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를 후원하는 사회적 취지가 있는 한편, 컬렉터의 고상한 취향과 재력을 과시하고 작품 매매로 차익을 거두는 등의 사적 욕구도 섞여 있다. 프리즈와 더불어 양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의 컬렉터 설문조사 결과를 보아도 그렇다. 한국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및 순회전시를 보며 일반 시민들이 비로소 컬렉팅의 이러한 복합적 면모를 알게 되고 부정적 면모만 보았던 과거에 비해 긍정적인 면모를 체감하게 된 것이다.

32년째 월급을 쪼개 컬렉팅을 해왔고 컬렉터들에 대한 책 『디어 컬렉터』를 내기도 한 김지은 아나운서도 이건희 컬렉션 공개가 큰 전환점이 되었다며 “일반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컬렉팅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중앙SUNDAY 8월 17일자). 그는 또 “이전 세대 컬렉터들이 수줍고 비밀스러웠다면 요즘 컬렉터들은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컬렉팅의 전후를 활발히 소통한다”고 했다. 이들의 활동과 소통의 주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된 것이다.

그 외에도 프리즈 서울의 중요한 효과 중에 해외의 기관 컬렉터(미술관), 개인 컬렉터, 화랑 관계자들이 한국으로 국내 활동 작가들을 보러 오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 1990년~2010년만 해도 한국 작가들은 유학을 하거나 해외에서 작업을 해야 자신을 알릴 수 있었던 것에 비해서 말이다(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의 말).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납부받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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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강원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개막한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관람객들이 국보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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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을 인지해 정부도 아트페어를 활성화하기 위해 페어 기간에 맞춰 해외 미술계 명사들을 초청하고 이들이 한국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애를 쓰고 있다. 마이어리거 등 해외 갤러리들도 이 점을 언급할 정도다. 이런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평은 긍정적인 편이다. 그런데 정부는 국내 컬렉터들을 위한 제도 개선에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가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작품으로 대납하는 물납제의 확대다.

1896년 세계 최초로 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한 영국은 이 제도를 통해 많은 명작들을 납부받아 국공립 미술관에 소장·전시해왔다. 그 한 예가 지난해 말 무려 1050만파운드(약 183억원)의 상속세 대신 영국 정부에 납부된 희귀한 르네상스 시대 브론즈 조각 ‘벨베데레의 아폴로’(동명의 고대 그리스 조각을 재현한 것)다. 컬렉터의 후손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작품을 급매하지 않아도 되고, 국공립미술관은 예산으로 감당 못 할 희귀한 미술작품·유물을 얻을 수 있으며, 대중은 못 보던 작품을 보게 되니 윈윈인 제도다.

한국도 지난해 3월 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해 상속세가 2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에 적용하기로 했지만, 최근에야 첫 물납 사례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부동산·금융자산 등 모든 상속 재산에 대한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는 영국과 달리 한국은 미술품에 대한 상속세만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미술작품·유물 컬렉션 전체를 기증해도 거기에 붙을 세금을 안 내는 것일 뿐 아무런 다른 혜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늬만 물납제”(정준모 미술평론가)라는 말까지 나온다.

간송과 이건희 컬렉션의 예를 봐도 ‘K아트’를 떠받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컬렉션이다. 컬렉팅 문화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정부는 해외 컬렉터를 향한 프로모션뿐만이 아니라 국내 컬렉터를 위한 제도 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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