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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이기홍 칼럼]문재인 비리청산, 정치보복인가 시대의 사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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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동맹’ 맺고 강력 반발하는 문재인-이재명

검찰수사 그렇게 못 믿겠으면 특검 제안하라

조족지혈, 만시지탄, 당연지사인 文 비리 청산

尹, 늦은 만큼 더 확실히 하는 게 국민에의 의무

동아일보

이기홍 대기자


“검찰 수사가 흉기가 되고 정치보복 수단이 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지난 일요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방문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다혜 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문 정권 비리 청산’이 중단되어야 할 정치보복인지, 정의의 복원을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기준점을 따져보면 되기 때문이다.

첫째, 정치보복 여부는 비리 의혹의 내용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기획수사로 주변까지 샅샅이 뒤져 흠결을 찾아내고, 얼기설기 엮어 몰아갈 경우 이는 정치보복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사안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야당 내에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 드러난 의혹들은 정치적 내용이 아니다. 개인비리 의혹도 정치보복이어서 조사를 못한다면 법질서는 왜 존재하는가. 이 대표도 정치보복 주장만 펼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원전, 통계 조작, 대중(對中) 삼불일한 약속, 대북정책 의혹 등의 주제들 역시 해당 사건의 장본인이 문재인이든 윤석열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덮어주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 결코 아니다.

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응당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용들이고, 묻혀 있는 최종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후속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다.

둘째, 전임 정권 청산이 반복되면 국민 분열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미 정신적 내전 상태인 좌우 진영 간 대립이 더 격화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리를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걸 관례로 만들 수는 없다.

‘전임정권의 허물을 처벌하는 악순환은 멈춰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진실도 밝히지 않은 채 덮어주고 가는 것이 화해와 용서는 아니다.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건 화해가 아니라 야합이다. 설령 윤 정부가 전임 정권 비리 청산을 하지 않는다해도 야당이 차기 집권할 경우 전임 정권 청산의 수레바퀴는 다시 더 거세게 돌아갈 것이다.

협치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말장난에 가깝다.

그동안 윤 대통령이 문재인 비리 청산을 뭉개 왔다고 해서 협치가 이뤄졌나. 좌파 진영과 친문 친명계가 보수 정부에 조금이라도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좌파는 압박을 느낄 때 협상장으로 나선다. 비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엄정하고 원칙적으로 임하는 게 결과적으로 협치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적폐 청산을 하려면 힘있는 임기 초에 했어야지 이미 임기 반환점을 목전에 둔 시점에 매달리면 소모적 싸움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린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끝내 뭉개버리면 이는 전임 정권의 비리에 방조범이 되는 것이다.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라도 명확히 인식하고 실행한다면 평가받을 것이다.

물론 늦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대통령실 주변에선 자꾸 검찰총장 탓을 하지만 통치권자가 명확한 방향 설정을 안 한 탓이 가장 크다. 국민은 윤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의리 때문에 시대적 과제를 외면해 온 것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다.

문다혜 건은 본질과 관련 없는 곁가지라는 지적도 백번 맞다. 울산시장 선거, 서해 공무원 사건 등의 최종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면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청산해야 할 문재인 비리 리스트에는 사법적 정의 차원을 넘어 국가 운영 차원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내용들이 허다하다.

남북 간에 어떤 내용과 제의가 오갔는지 후임 정부는 모른다.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은 무슨 근거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했는지,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준 USB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대북 지원 약속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다 비밀로 봉해졌다.

중국에 삼불일한을 누가 어떤 워딩으로 약속했는지도 비밀이다. 그런 핵심 내용을 모른 채 후임 정부가 어떻게 전략을 짜고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통치권은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통치행위라해서 절대적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명백히 밝혀내야 하며, 결정 과정에서 법률 위반이 있었다면 처벌 받아야 한다.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감사원이 나서서 진상을 밝힐 수 있다.

물론 저항도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지난 일요일 이재명-문재인 간의 ‘방탄동맹’이 구축됐는데 이는 2년 전의 데자뷔다.

2022년 10월 감사원이 서해 피살 공무원 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요청하자 문 전 대통령은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반발했고, 이 대표는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전 정부에 정치보복을 가한다”고 거들었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집권 기간에 임명된 감사원장을 공수처에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고 감사원법을 개정해 특별감사시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겠다고 나섰다.

2년 전의 방탄동맹은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상대의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절실함으로 손을 잡을 것이고, 진영 내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은 좌파 생태계 특유의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검찰을 흉기로 규정하며 반발하는 이 대표와 민주당에 제안하고 싶다.

문재인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을 그렇게 못 믿겠고 편파 보복수사가 우려되면 특검 도입을 선도하라. 정말 정치보복이면 특검에서 문 전 대통령의 결백이 다 밝혀질 것 아닌가.

국민이 가장 분노하는 점은 문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나라의 궤도를 이상한 쪽으로 틀어버리려 한 점이다. 진실을 밝혀 책임을 묻지 못하면 자기 멋대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권력자가 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국민이 정치 초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것은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한 첫걸음을 이제 겨우 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늦은 만큼 더 확실히 해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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