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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힘 빼고 그린 습작의 힘[이은화의 미술시간]〈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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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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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반 고흐가 그린 ‘아이리스’(1889년·사진)를 보면 나태주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꼭 시인의 마음으로 그렸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고흐는 분명 이 꽃들을 자세히 오래 관찰한 후 애정을 담아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건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1889년 5월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아팠지만, 그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림을 계속 그리면 미쳐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델도 구할 수 없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그리기 힘든 상황에서 고흐는 병원 정원을 거닐다 꽃을 발견했을 것이다. 아니 꽃이 그를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릴 때는 신명 났을까. 화가의 몸 상태와 달리 그림 속 아이리스는 생기로 가득하다. 강한 윤곽선, 선명한 색채, 과감한 구도는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고흐는 이 그림을 습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스케치가 없다. 동생 테오의 생각은 달랐다. 형을 대신해 그해 9월 파리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출품했다. 고흐의 또 다른 명작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그런 후 형에게 편지를 썼다. “(그림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와. 아이리스들은 공기와 생명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작품이야.”

습작은 한마디로 ‘힘 빼고’ 그린 그림이다. 연습용이기 때문에 가장 자유분방한 상태에서 그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화가의 스타일과 평소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흐 사후 이 그림을 처음 구입한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의 표현대로 ‘꽃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담은 걸작이었다.

테오와 미르보가 옳았다. 습작으로 여겼던 고흐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아이리스’는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중 하나로 시대를 넘어 사랑받고 있다. 지금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미술관에는 이 그림을 보기 위한 순례 행렬이 줄을 잇는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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