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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가지 않은 길' 그리고 '가지 못한 길'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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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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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이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한참을 서서 멀리멀리 바라보았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큰 소리로 낭송하기에는 가을 숲이 제격이었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산국화 향기 가득한 숲길을 오르면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가린 상수리나무 군락지가 나왔다. 거기 커다란 상수리나무 잎들을 따 모아 만든 자리에 누워서 감정을 한껏 부풀려가며 시를 읽다 보면 갈색으로 여문 도토리 열매가 가을바람에 밀려 툭툭 떨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갈라지는 햇살을 올려다보면 상상은 만 갈래로 가지를 치곤 했다. 이 작은 숲길 여기저기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와 풀들의 풍경은 한달음에 내달리며 다 볼 수 있지만, 훗날 내 삶에서 시인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바위 위로 달려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오래오래 시간이 흐르고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너무 늦게 깨달을지 모를 내가 가여워지는 바람에 대책 없이 엉엉 울곤 했다.

조금 더 자라고 청년이 되면서 알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지 않은 길'보다 '가지 못한 길'이 더 많다는 것을.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거나 단단한 장벽에 가로막힌 채 한 발짝도 진입을 허락지 않는 저 건너 꿈결 같은 숲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누군가는 무릎이 꺾이고, 또 누군가는 평생을 두고도 털어내지 못할 절망감에 압도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타인의 말들이 무작위로 귀에 꽂히는 건 일종의 병이다. 가끔 가는 작은 찻집에서 그 청년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작년 가을이다. 직장 동료와 함께 차를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던 그의 말이 내 귓전에 박혔다. 이후 같은 장소에서 두어 번 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교육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의 꿈은 서양사학자가 되는 거였다. 유학해서 공부를 더 하고,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현실에 발목 잡혀 취업한 지 5년이 넘었지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고통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지배하는 듯했다. 툭툭 털고 떠날 수도, 그렇다고 좋게좋게 받아들이기도 힘든 현실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며 시시때때로 그를 뒤흔든다고 했다.

벌써 네 번째. 등을 마주 댄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데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기 연민은 금물이라고. 아쉬움과 선망을 걷어낸 자리에서 보면 그 숲이나 이 숲이나 생태의 밑그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보다는 여기서 만나는 의외의 풍경과 아름다움에 착목해 보자고. 주제넘고 쓸모없는 생각이 곁가지를 치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을 열기 직전 무심코 안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명민한 그의 눈빛에 한순간 당혹감이 서렸다. 누군가 자신의 넋두리를 죄다 엿듣고 있었음을 청년이 그제야 알아챘다는 게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곤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망설이다가 눈썹과 입가를 크게 움직여 눈인사로 한마디를 남기고는 얼른 돌아섰다. '당신 참 예뻐요.' 그나저나 그 찻집에는 당분간 못 갈 것 같다.
한국일보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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