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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치열한 싸움 과정 안에서 역사가 산다…관심 꺼지면 역사는 죽는다"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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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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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의 더 깊은 이야기, 윤춘호 언론인이자 작가의 심층인물탐구 '그 사람'.


1.
광복절을 전후해 벌어진 역사 논쟁을 보면서 이 사람을 생각했다. 역사가는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전공이 서양사, 그중에서도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를 공부한 사람이다. 전공으로만 보면 이 논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지만 반평생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니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번 논쟁을 바라볼 것이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에 뾰족한 해법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남의 나라 역사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겠고 그 깨달음에 비추어 우리 역사를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통찰, 또는 역사에 대한 혜안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듣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격렬한 '역사 교과서 전쟁'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고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톨레랑스, 즉 관용이라는 단어가 이 유럽 국가에 자리 잡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논문을 썼다. 갈등과 불화가 깊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가치가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용인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서도 들을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마침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온갖 문화적 상징과 역사적 경험을 펼쳐 놓은 무대였다. TV 채널을 돌려가면서 봐도 그 개막식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짚어주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충남 아산에 있는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승휘였다. 프랑스에서 10년 유학을 했고 거기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교에서 20년 넘게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직에 취임했고 한국서양사학회에서도 총무이사 등으로 오래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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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간 이후 알고 지낸 40년 지우다. 할 이야기 못 할 이야기 다 털어놓고 살아왔지만 정작 '역사가 임승휘'에 대해서는 그리 아는 바가 없었다. 역사가는 어떤 사람인지, 역사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새삼스럽게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는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 질문은 40년 전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서양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나섰던 필자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서울 낙성대역 부근에 있는 서양사 연구실에서 지난달 18일 일요일 오후 진행됐다. 필자는 임승휘 교수, 임 교수님이라고 불렀고 이 사람은 필자를 윤 기자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너, 나로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파리 올림픽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프랑스 역사 전공자로서 파리라는 도시가 주인공이 된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소회가 역시 남달랐다.

"넋을 놓고 봤어요. 재밌다, 참 재밌다. 제 첫 느낌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문화나 예술,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모르면 이해가 안 가는 장면들이 많았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냐고 물으면 지독하게 프랑스스럽고 지독하게 파리스럽다고 대답했습니다. 프랑스식 국뽕이 차오르는 개막식이었달까요. 자기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벅차오르는 자부심의 표현이고 여기에 이것을 절제하거나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본인들은 그거 과장한다고 생각도 안 했을걸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어서 그냥 과장된 화려함으로 저는 얘기를 하는 거죠. 진짜 프랑스식 국뽕이 차올랐어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그 나라의 안과 밖을 두루 살필 줄 아는 것은 역사가만의 특권이다. 개막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아 그 대목이 그런 뜻이었구나, 그 장면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구나'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문가는 역시 다르다 싶었고 역사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대 평가된' 올림픽 개최국의 현재에 대한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프랑스가 갖고 있던 공화국의 이상이라든가, 프랑스 혁명 이념이 좀 화려해요. 어쩌면 지나치다 싶게 화려하잖아요. 자유 평등 인권 이런 기치들이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이고 관용도 그렇죠. 근데 개막식에서 보여준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사실 곪아터지고 있는 21세기 프랑스의 현실이 있는 거죠... 프랑스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인데 그런 나라에서 극우 정당들이 지금 판을 치고 있는 거죠... 극우 정당 가운데 재(再)정복당이라는 당이 있거든요. 우리 조국 프랑스를 이주민에게 빼앗겼다. 그러니 이들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게 재(再)정복당인데 그런 정당들이 30% 이상 표를 얻고 있단 말이에요."

2.
한 케이블 채널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꽤 알려졌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셀럽 수준의 인기를 얻고 있는 역사학 전공 대학교수들이 몇 명 있다. 이 사람도 그중의 한 명이다. 2021년 7월 태양왕 루이 14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번 출연했다. 처음 출연하고 난 뒤 이 사람의 지인이 올린 SNS 댓글이 재미있다. "승휘 형이 이제 결국 뜨시는군요. 그때가 언제일까 늘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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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알던 사람들에게 임승휘는 '언젠가는 결국 뜰 인물'이었다. 그 이후로 다른 방송과 유튜브에서도 종종 출연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고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가끔 만난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다룬 소재들이 루이 14세, 쟌다르크, 카사노바, 나폴레옹 같은 이름이 귀에 익은 인물도 있지만 여왕 마고, 루이 15세 같은 다소 낯선 인물이나 소재도 적지 않다. 재방송도 많이 돼서 같은 방송을 여러 번 보기도 했는데 지루한 줄 모르고 봤다. '역사 전도사 임승휘'의 탄생을 목격하는 심정이었다. 그 방송을 볼 때마다 역사, 특히 서양사가 드디어 대중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하는 듯해서 한때 사학도였던 사람으로 흐뭇했다.

역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의 여기(餘技), 아니면 지적인 호사 같은 느낌도 있다.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서양의 역사는 더 멀게 느껴진다. 수십만 명이 치르는 수능에서 세계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2만 명 남짓, 수험생이 가장 적은 과목 중의 하나다. 한국서양사학회 회원 수는 570명 정도, 고고한 자부심과 도저한 자존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대중들과 거리가 멀었고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도 없다. 그랬던 그 학문이 드디어(?)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이 사람의 역할도 적지 않다.

-역사, 특히 서양사가 방송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두고 격세지감, 그다음에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표현하셨는데 이렇게 서양사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이유가 뭘까요?

"거시적으로 얘기하면 세계화가 첫 번째 이유겠지만, 그 이전에 우리나라가 갖는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반도에 위치하다 보니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기본적으로 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이 이제 남의 집 사정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여유가 좀 있어졌다. 여유 없으면 그런 데 관심을 안 갖잖아요? 이거 안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변하고 내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런 관심이 생기는 거죠. 그것을 교양의 확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과 잘 맞았던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콘셉트와 관련해 자문을 구하는 제작진을 만났고 그 만남이 출연 요청으로 이어졌다. 처음 출연을 결정하고 대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못 하겠다고 했다. 흥미 위주 구성에 지엽말단적인 사실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고 꼭 전달해야 할 사실이 대본에서 빠진 것처럼 보여 영 마땅찮았다. 어찌어찌 첫 방송을 마쳤고 반응이 좋았다. 반응이 좋으니 다시 출연 요청을 받았고 그런 일이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스튜디오가 편하고 프롬프터 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시청률을 생각해야 하는 제작진의 고충도 이해한다. 자신은 다섯 시간 녹화하면 끝이지만 하루에 두 편을 찍어야 하는 진행자들 입장까지 헤아릴 여유가 생겼다. 작가들도 이 사람이 이제 물이 올랐다고 표현했다.
"임승휘 교수님 강연은 되게 안정적이세요. 저희 진행자들이 주제나 역사적 배경에 전혀 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강연을 듣는 게 쉽지 않은데 임 교수님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강연을 이끌어 가서 흡입력이 크신 분이죠. 또 아이템 선정이나 다른 교수님 섭외 관련해서도 도움을 많이 주시기 때문에 저희도 연락을 자주 드리려고 합니다."

-김수진 tvN '벌거벗은 세계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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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이 결정되면 온전히 3주는 매달려 준비한다.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대본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담당 작가들이 프로그램 한 편을 하면 석사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이 사람은 평가했지만 언제 어디서 오류가 나올지 모른다. 이 사람이 출연한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흑사병 등과 관련해 틀린 내용을 전했다는 지적을 받고 제작진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강의와 학생 지도, 학회 활동에 전념하던 사람이다. 학교 아닌 곳에 기웃거린 적 없고 개인 SNS도 별로 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방송과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재미가 크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항상 갈증 같은 게 있었거든요. 이 재미난 얘기를, 이 흥미진진하고 유익하고 교훈이 많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데 제가 의존할 수 있는 거는 제한적이란 말이죠. 기껏해야 눈빛과 표정 제스처 이거밖에 없는 거죠. 제 뒤에 그림이건 영상이건 이런 것이 제가 말할 때마다 쭉 나와줬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30년 전부터 했던 것 같아요. 역사적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원했는데, 방송이 그런 걸 해주더라고요."

방송 출연을 계기로 역사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게 됐고, 글을 쓰는 자세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이것도 몰라, 모르면 읽지 마' 이런 느낌으로 썼다면 이제는 '이 내용은 잘 모르실 것 같은데 조금 설명을 해드리자면'이라는 것이다.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서려는 자세의 필요성을, 방송을 준비하고 방송을 만들어 나가면서 배웠다는 것이다.

"2002년도 2003년도에 인문학의 위기 이야기 나올 때 글쓰기에 관한 학술대회가 몇 번인가 열렸어요. 서양사학회에서도 열리고 문화사학회라는 데서도 열렸는데 국내 연구자들이 이렇게 많고 논문도 쓰고 책도 내고 하는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책을 안 보냐, 연구자들의 글을 쓰는 태도, 글쓰기에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취지로 꽤 거창하게 학술대회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문제가 뭔지는 아는데 해답이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고찰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이 방송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방에 해결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

3.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고 학력고사 성적도 좋았다. 법대에 가서 법조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입을 앞둔 시점까지 역사를 전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입 학력고사에서 틀린 문제의 절반이 세계사와 국사였다. 그 생각을 말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역사를 전공할 거 아니면 집을 나가라는 호통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역사는 대를 이어서 공부할 만한 학문이었고 역사가라는 호칭은 아들에게 강권하고 싶을 만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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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오른쪽)와 어릴 적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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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임명방 전 인하대 교수는 1950년대 로마에서 유학한 한국 1세대 서양사학자였다. 할아버지는 인천의 거상이었고 할머니는 집안에서 신부가 나오면 위로 3대, 아래로 3대가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 아들 중 둘째인 임영방 전 서울대 교수는 파리로, 막내인 임명방은 로마로 유학을 보낸 것은 사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집안에서 사제가 나오지는 않았다.

치즈를 먹으며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요리 푸아그라가 낯설지 않았단다. 선택지로 놓인 서양사, 국사, 동양사 중에서 서양사를 택한 것은 그나마 좀 덜 촌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라지만 집안 내력을 보면 서양사학자의 길은 주어진 길이었다. 그 이후 삶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한 것도, 역사학과 교수가 되는 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그 역시 정해진 코스였다.

1984년 대학에 들어와서 이 사람을 처음 만났다. 39명 동기 가운데 '서양사'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외양을 하고 있던 친구였다. 그 시절 파마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외양을 한 친구였는데 그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대학 시절은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명확한 기준이 생긴 시절이었다. 그 기준은 아무리 깎아내려 해도 깎아낼 수 없는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적 약자를 등치는 것, 그것만은 말자. 공부깨나 했으니, 제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뻔히 보이잖아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는 게 잘난 사람들한테 폐가 되는 건 상관없어요.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한테 분명히 해가 갈 게 뻔한데 그런 일을 한다? 그거는 못 하겠더라고요, 아직까지는. 100번을 양보해도 해서는 안 될 게 있고 해도 괜찮은 것들이 있는데 그 기준은 지금도 넘고 싶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1980년대는 정치적 억압의 시대였지만, 다른 의미에서도 억압의 시대였다. 이 사람 표현을 빌리자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던,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파마를 하는 것도 사실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것에 능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다. 대학 시절은 그 이후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정서적 억압의 시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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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훈련병 시절 아버지 임명방 교수, 어머니 임순중 여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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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파리의 공기는 이 사람을 자유롭게 했다. 스코틀랜드 전통 양식의 치마를 사기도 했고 요리학원을 다니며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에 가서 1년 동안은 빵과 라면만 먹었는데 대학 시절 내내 57kg이던 체중이 10kg이나 불었다. 자유의 공기가 체중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유학 시절 본격적으로 패션과 요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역사가가 아니라 요리사를 했어도 잘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음식점을 하면 어떨지 생각하고 시칠리아 같은 데 가서 음식점 여는 것이 인생의 버킷 리스트다. 얼마 전에는 딸의 권유로 팔에 문신을 했다. 방송할 때 그 문신 때문에 반팔 셔츠를 못 입는 게 불만이다. 공부하는 재미를 알았던 것도 파리 유학 시절이었다. 그 기쁨은 역사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라서 더욱 각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 읽는 재미를 느끼긴 했는데 유학 시절에 통찰을 던져주는 책들, 마치 제 머리를 누가 곡괭이로 때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을 알게 됐죠. 처음에는 그냥 우연인 줄 알았어요.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이래서 공부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료를 보는 작업은 되게 지루하고 의미 없는 단어들이 막 나열되는 것 같은데 그 의미 없는 단어와 숫자들 더미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서 마치 실에다 구슬을 꿰듯 엮어서 끄집어 올릴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전공은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이다. 만약 서울에서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전공 선택은 파리가 이 사람에게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마음이 가는 분야였고 그래서 더 열심히 파고들었다. 역사가는 공부를 한다고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보다.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17세기 프랑스의 가톨릭 교도들의 정치사상. 한국 사회에서 별로 관심이 없는 주제였어요. 1990년대 파리에 서울대학교 선후배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저랑 같이 다니던 선배들 논문 주제가 프랑스 노동총연맹, 프랑스 사회당 역사 이런 거였어요. 제 프랑스 친구들이 어느 날 저한테 와서 '야 너는 어떻게 한국에서 프랑스로 나올 수 있었어? 뭔 소리야? 그랬더니 너는 노동운동사도 아니고 사회당사도 아닌데 한국에서 어떻게 너 내보내 줬어?'라고 묻더라고요. 그게 그 시절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에 갖고 있던 인식 수준이기도 한데 이제 1980년대에 대학원 진학하고 공부의 길로 간 386세대들의 뭔가 심리적인 부채감의 표현이랄까요, '최소한 공부 주제만큼은 이런 걸 해야 하겠다' 그랬던 거지요. 근데 저는 그런 것조차 없는 놈이었던 거지요."

박사과정 공부가 쉬웠던 것은 아니다. 내가 과연 이 과정을 마칠 수 있을까 회의에 빠지기도 했고 처자식을 둔 가장으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죽어라 프랑스어 공부를 했고, 책을 붙잡고 씨름했고, 공부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갔다. 꽤 오랜 시절 만나왔지만 힘들다,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만남에서야 유학 시절과 귀국 이후 몇 년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인생 살면서 그 정도 어렵고 힘든 일은 누구나 다 있는 법이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받은 게 많고 누린 게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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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학 시절 아들 진수 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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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1998년, IMF 사태가 터진 직후였다.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 무렵 박사 학위를 가지고 대학교수 자리를 노리는 같은 과 출신 선후배가 스무 명이 넘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교수 자리가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5년 가까운 시간강사 생활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2003년에야 선문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자기는 빨리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했다. 교수 임용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명함을 만든 일이었다.

유학을 떠난 1988년부터 대학에 자리를 잡은 2003년까지 15년은 인생의 단맛은 물론 쓴맛과 신맛을 골고루 맛본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게 박사학위, 교수 자리, 역사가라는 타이틀만은 아니었다. 돈이 궁하다는 게 뭔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절박함도 깨달았다. 그 이후에도 지방대학 교수로서 비주류의 경험을 심심치 않게 했다. 그런 경험 역시 '역사가 임승휘'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4.
지금까지 몇 권의 중,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집필했다. 지난달에도 자신이 주요 집필자로 참여한 중학교용 역사, 고등학교용 세계사 교과서가 각각 교육부 검정을 통과했다. 역사 교과서는 인화성이 높은 예민한 소재다. 필자의 이념적 성향을 따지고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한다. 역사 교육에서 정치적 중립지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역사는 선택지가 다양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적어도 역사 교과서 집필은 선택지가 하나뿐인 문제를 푸는 느낌도 없지 않다.

"저도 중학교 역사 교과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긴 한데 사실 교과서를 딱 보면 식민지 시기 역사는 침탈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 딱 두 갭니다. 물론 분량의 제한 때문에 모든 걸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는 건데 그거 딱 두 개인 거죠. 이런 사정을 모르는 외국 사람이 그 교과서를 보면 조선이 몰락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해방 때까지의 역사는 극소수의 나쁜 놈 2명은 나라 팔아먹고 나머지 98명은 모두 저항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저항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게 정치적으로 중립지대를 허용하지 않아요. 저도 어디 나가서 이런 얘기 쉽게 못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잖아요?"

젊은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우는 데 역사만큼 유용한 학문은 없다고 했다. 사료와 사료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상상력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역사 교과서 서술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문제 삼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무래도 답답하다. 마치 대학 시절 못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은 눈치가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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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된 광복절 논쟁에 대해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화제가 됐던 뉴라이트의 대부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의 인터뷰 자료를 보내주고 의견을 물었더니 "생경하다"고 짧게 평가했다. 뉴라이트를 이념적으로 좌, 우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서구 학계 기준으로 보면 헷갈릴 거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말을 걸러 가면서 하는 느낌이었다.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선동하기 참 좋거든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게 네 편, 내 편 가르는 거예요. 네 편은 나쁜 편, 우리 편은 좋은 편.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는 사이다적인 요소가 강하거든요. 나는 지금 갈증이 나는데 '미지근한 물이 몸에 좋아, 거기다 나뭇잎 띄워 줄게' 그러고 있는데 한쪽에서 그게 뭔 소리야 하면서 사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가기 쉽지요."

건국절 논쟁과 역사 교과서 문제로 여론이 들끓었던 지난 2008년 프랑스 역사 교과서 논란을 다룬 논문을 썼다. 우리와 비슷한 갈등이 프랑스에서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있었다는 것, 그 논쟁이 프랑스를 거의 둘로 쪼개 놓았다는 것, 역사 논쟁에서 정치적 중립지대는 없다는 내용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논란이 된 역사 교과서 저자들이 생리학 교수와 목사 같은 역사 비전공자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그 시절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역사 전쟁 때 그랬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훈련받은 역사가들은 그렇게 안 써요. 어쨌든 학계에서 공부하고 석사 박사를 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쓰진 않습니다. 뉴라이트 하는 사람들 보면 역사학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꽤 있잖아요. 역사학 하는 사람이 제대로 못 하니까 우리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프랑스 역사 논쟁 때와 똑같은 이야깁니다."

현안에 대한 다소 신중한 자세는 남의 영역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학계의 불문율이거나 예의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지대가 없는 싸움에 발 담그기를 꺼리는 몸조심일 수도 있는데 필자에게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 말이 더 솔직하게 들렸다.

"서양사를 하면서 장점이자 단점. 제가 외국인이니까 당연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거리를 두고 봅니다. 거기에 대한 예찬도 없고 환상도 없습니다. 그만큼의 거리는 아니지만 서양사를 하다 보니 한국 사회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거리를 두고 보는 겁니다.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보이지가 않아요."

뉴라이트 진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나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박지향은 모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다.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한국사와 서양사는 연구 대상을 달리할 뿐 역사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거친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때로는 역사로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듣는 사람들이다. 동문이자 스승이기도 한 두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생각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역사의 다양한 쓸모 가운데 정치적 용도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의 기록과 해석의 권한을 장악한 자가 진정한 권력자였다. 정권이 바뀌면 마치 정해진 과정인 양 역사 교과서가 바뀌는 것은 그런 역사의 잔재라면 잔재겠다. 올여름 광복절 논쟁 역시 그 본질이 역사를 동원한 권력 싸움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학문이고 역사학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게 어떻게 보면 용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건 굉장히 늦게 나온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이러니한 게 역사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를 내세우면서 우리도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인정해 달라라고 해서 역사학이 발전했는데 사실 역사학을 발전시킨 것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입니다. 우리나라도 4년제 대학에서 국사학과 역사학과가 생긴 게 대부분 다 박정희 시대잖아요? 일부 예외적으로 오래된 대학들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 나왔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종사자들은 그런 정치적인 목적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또 대부분 시대적인 어떤 특성상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는 정치적으로 반대편 지역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죠."

프랑스 역사에서 꼭 짚어주고 사건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 군 참모본부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군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계기로 벌어진 일이었다. 드레퓌스는 군 기밀을 유출한 적도 없고 이 사건의 진범이 따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프랑스 군부는 이 사실을 은폐했다. 프랑스 대중들은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압도적으로 군부를 지지했다. 12년이 지난 후에야 드레퓌스는 무죄가 확정되었다.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불고 있던 광적인 민족주의 열풍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두 동강 낸 사건입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이러다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만큼 국론이 분열된 사건이었죠. 프레임에 갇히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뻔히 나오는데도 프랑스 국민들은 무조건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겁니다. 심지어 드레퓌스를 다시 재판하는데 파리에서 재판도 못 합니다. 대중들의 반발 때문에 파리에 들어오지도 못한 겁니다. 드레퓌스는 처음에 이제 무죄도 아니고 사면으로 석방됩니다. 죄는 있다, 이걸 부정할 수 없다는 오도된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반대 증거도 나오고 진짜 첩자가 누군지도 밝혀졌지만, 드레퓌스는 절대로 무죄일 수 없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프레임이거든요."

이 사건은 "나는 고발한다"를 쓴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중들의 광기에 맞서 저항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지나치게 국수적인 역사 교과서, 배타적인 민족 감정을 고취하는 교과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100여 년 전에 있었던 프랑스의 그런 경험을 통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배웠으면 좋겠냐 하면 프랑스처럼 저렇게 싸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치열하게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싸웠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렇게 싸우지는 않잖아요. 대중들의 관심, 국민들의 관심은 잠깐 그러고 나서 사라져 버려요. 저때 프랑스는 진짜 정말 죽일 듯이 싸웠거든요. 그나마 제 기억에 한국에서 역사를 갖고 치열하게 싸웠던 거는 국정교과서 때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말 난리가 났어요. 저같이 관심 없는 사람이 저런 논문을 쓸 정도면... 근데 지금은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지 않아요. 저 사람들 또 저러다 말겠지 약간 이런 느낌. 그러니까 오히려 전 이게 안 좋은 것 같아요. 권투로 치면 툭 잽을 던질 뿐이지 누가 K.O. 될 때까지 한번 싸워보자 이건 아니거든요. 차라리 그렇게 해서 싸워야 해요... 그 싸우는 과정 자체가 국민들한테는 교육이라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 정답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 그 안에서 역사가 살아요. 근데 관심이 꺼지잖아요, 그러면 역사는 죽는 겁니다."

프랑스가 톨레랑스, 즉 관용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지난 4월 고인이 된 홍세화가 쓴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역할이 크다. 학문적으로 보면 이 사람의 역할도 기억할 만하다. 자신의 전공과도 무관치 않으니 이 부분을 말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진 신-구교 간의 종교 전쟁은 우리나라 6.25 전쟁하고 겹친다. 프랑스는 성모 마리아한테 존대할 것이냐, 반말로 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를 죽였고 20세기 한국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를 죽였다. 프랑스는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30년 넘게 치렀고 한국은 3년을 싸웠다. 프랑스는 종교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었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 관용이다. 관용은 "승자가 패자만큼 때로는 패자보다 더 잃는 것이 많았다"는 인식 끝에 나온다고 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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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 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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