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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신고 7만790건, 구속은 226명…겨우 재판 가도 ‘초범이라 감형’ [더 이상 한명도 잃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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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사랑해서 그랬다’는 거짓말을 믿나요

‘바리캉 폭행 감금 사건’ 가해자 범행 부인

가해자 측 변호인, 증인 출석한 피해자에

‘성관계 얼마나 했냐’ 폭행 무관 질문 세례

피해자 충격에 실신…현재도 정신과 치료

지난해 7월, 경기 구리시 한 오피스텔에서 20대 남성 A씨가 여자친구를 감금한 뒤 수차례 강간하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A씨는 바리캉으로 상대의 머리카락을 미는가 하면 얼굴에 소변을 누거나 침을 뱉는 가혹 행위까지 저질렀다. 피해자는 5일 만에 오피스텔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 사건은 ‘바리캉 폭행 감금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끔찍한 피해에 공감하며 A씨를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한 시민들의 탄원서는 1·2심 합쳐 2만5000건이 넘는다.

한국여성의전화 이제 활동가는 피해자가 의료·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다. 지난달 22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피해자는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20여종의 약을 복용할 정도로 후유증이 크다. 정신과 치료와 심리 상담을 병행하며 회복에 집중하는 상황”이라면서 “감금 당시 피해도 문제지만, 이후 재판 과정에서 범행을 부인하는 가해자와 이를 두둔하는 변호사들의 행태가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고 설명했다.

이제 활동가에게 ‘바리캉 사건’ 재판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교제폭력을 다루는 재판에서 어떤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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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칸 폭행 감금 사건’의 피해자 지원과 상담을 담당한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이제 활동가. 지난달 22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회의실에서 만난 이제 활동가는 “피해자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치료받으며 회복에 힘쓰고 있다. 감금 당시 피해도 문제지만, 이후 재판 과정에서 범행을 부인하는 가해자와 변호사들의 행태가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고 설명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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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 ‘더 이상 한명도 잃을 수 없다’ 아카이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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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 단계 좌절, 법정 오는 것도 어려운데…
“재판부, 폭력 정당화하는 신문 제지 안해”


A씨는 범행 직후 피해자 가족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고 이후 구속됐다. 가해자가 재판에 넘겨졌는데도 피해자는 줄곧 괴로움에 시달렸다. A씨가 대형 로펌 소속의 전관 출신 변호사 3명을 선임해 무죄를 주장하고, 도리어 피해자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제 활동가는 “가해자는 감금 당시에도 피해자를 협박하며 ‘나는 어떻게든 너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 ‘고소해봤자 돈이 많아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면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결국 큰 처벌 없이 풀려날까 봐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일부 폭행을 제외한 공소 사실 대부분을 부인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1심 때 증인 신문에 출석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법정을 찾았다. 이제 활동가는 “보통 피해를 당하면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피고인과 분리된다 해도, 같은 법정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2차 피해가 될 수 있다”면서 “그런데 연인 관계였다는 이유로 피고인 측 변호인은 사건과 상관없는 질문 수십가지를 던지며 취조에 가까울 정도로 피해자를 몰아붙였다”고 말했다.

1심 때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인 피고인 측 변호인은 증인 신문에서 ‘누구와 어떻게 성관계를 했느냐’ ‘며칠부터 얼마 동안 했느냐’ 등 감금·폭행 범죄와 관계없는 내용을 반복해서 물었다. ‘피고인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오해해 폭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당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에서 실신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2심에서는 A씨 변호인이 서울고등법원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 등으로 바뀌었다. 변호사는 재판 방청 연대로 힘을 모아준 시민들을 향해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들이 뭉친 것이 아니냐, 재판부를 압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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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7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에서 열린 여성의당 주최 교제폭력 처벌 관련 토론회. ‘바리캉 폭행 사건’ 피해자 가족(가운데 흰색 상의)들이 발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여성의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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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교제폭력 대책을 논의하는 여성의당 주최 토론회에 나와 증언한 피해자의 아버지는 “딸은 지금 손을 덜덜 떨어 숟가락질을 제대로 못하고, 환청·환시 증상까지 겪고 있다. 내가 일부러 거실에서 자면서 딸이 괜찮은지 계속 살펴보는 상황”이라며 “피해자가 누구랑 잠자리를 했다, 바람을 피웠다 같은 질문을 끝없이 받는 것이 과연 이 재판에서 필요한 과정이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차별적 낙인을 찍거나 2차 가해적 질문을 하는 것은 국제기준에서 크게 동떨어져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18년에 이어 지난 6월에도 한국 정부에 “젠더 기반 폭력 신고로 인해 보복당하는 여성들을 보호하고, 사법 절차에서 법원이 피해자의 의료기록 또는 성생활 이력을 재판의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권고했다. 1984년 국제인권조약인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권고 사항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이제 활동가는 “모든 재판 절차가 가해자 위주였고 재판부가 이를 그대로 진행시킨 것이 큰 잘못”이라고 말했다.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방식으로 이뤄진 증인 신문 등을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범죄는 애초 신고나 고소 단계에서 포기하는 암수범죄가 많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법정까지 오는 일이 드물다는 뜻이다. 이제 활동가는 “재판까지 어렵게 와도 가해자가 구속되거나 실형을 선고받는 비율은 극히 낮고, 피해자 보호 조치도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펴낸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친밀 관계 폭력의 개념화와 대응 방향 모색’ 보고서를 보면 2022년 ‘교제폭력’으로 집계된 112 신고 건수 총계는 7만790건이었는데, 검거 인원은 1만2828명에 그친다. 검거인원 중 구속 비율은 그보다 훨씬 적어 겨우 1.8%(226명)였다.

장기기증서약서, 봉사계획서, 재범방지서 등
가해자 5개월간 88회 ‘반성문’ 제출
정작 피해자는 “내 사건인데 열람도 못해”
처벌 기준 불명확해 양형 결과도 ‘복불복’


경향신문

한국여성의전화 이제(오른쪽) 활동가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가해자의 처벌을 촉구하며 1· 2심 재판부에 제출된 탄원서가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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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관계 내 범죄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보통 어떤 전조가 있었는지 묻는다. 이 질문의 기저엔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험성을 사전에 알아채고 ‘올바른 대처’를 했어야 한다는 시선이 녹아 있다. 피해자가 어느 정도 폭력의 빌미를 제공했을 거라는 의심도 깔려 있다. 무의식중에 피해자를 탓하는 잘못된 인식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피해자가 나서기 어렵게 한다.

교제폭력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인데도, 최근 여성 피해자 비율이 감소하는 반면 남성과 쌍방 피해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이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74.2%였던 여성 피해자 비율은 2022년 59.9%로 대폭 줄었다. 대신 남성과 쌍방으로 집계된 비율이 각각 18.2%, 21.9%였다. 젠더 위계에 따른 범죄라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양시양비론적으로 접근한 결과다.

이 범죄를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 또는 연인 간 시비로 여기는 통념은 재판 과정에서도 이어진다. 피해 당사자와 조력자들은 입을 모아 “내 아픔이 명확한데도 가해자를 처벌하는 과정이 이렇게 길고 어려울 줄 몰랐다”고 말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피해자가 형사 사법 절차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한계 때문이다. 피해자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고 재판 과정에 대한 정보도 크게 부족하다. 피고인 측이나 검찰이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면 피해자도 이에 대한 의견서나 탄원서를 내는데, 열람·등사 작업부터 더디다.

A씨의 경우 1심 당시 선고를 이틀 앞두고 1억5000만원을 기습 공탁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계속 거부했는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액을 공탁해 감형받으려 한 것이다. 그는 2심 선고를 앞두고는 5개월간 재판부에 무려 88번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했다. 반성문, 사과문, 장기기증서약서, 재범방지서약서, 봉사활동계획서, 출소계획서 등 종류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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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관계의 여성을 감금·성폭행한 ‘바리캉 폭행 감금 사건’의 1·2심 재판부에 제출된 가해자 합당 처벌 촉구 탄원서.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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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합의나 공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피고인이 재판부에 ‘금전을 통한 피해 복구 의지’를 전달하면 형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문제다. 이제 활동가는 “수차례 거부 의사를 표시한 피해자에겐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끝까지 고통을 줬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는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처벌할 법적 근거도, 양형 기준도 없다. 이에 따라 연인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진 폭력 행위와 강요, 협박, 살인 등에 대해 더 엄중히 다루기는커녕 일반 폭력과 동일하게 다뤄진다. 처벌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니 재판부에 따라 선고 결과가 복불복으로 나오고 오히려 초범이라는 이유로 감형되는 사례도 많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3년으로 대폭 감형됐다. 상당한 금액을 공탁하고 합의해 피해자 측이 처벌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재판부 정보를 개별로 공유하며 재판에 대응하게 된다. 이제 활동가는 “피해 지원 변호사들과 만나면 자연히 ‘사건이 어디 배당됐나’ ‘그 재판부는 어떻다던데’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 워낙 형량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지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비슷한 성폭력 재판에서도 어떤 재판부는 피해자 측도 공판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하지만 어떤 재판부는 그렇지 않다”며 “일반 상해나 폭행, 살인 미수 재판서는 더 편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교제폭력 사건에서도 성폭력이나 스토킹이 범죄 혐의에 포함되면 국선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지만, 일반 폭행으로 다룰 경우 이러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법적 공백이 큰 셈이다. 교제폭력 피해 사건을 수차례 변론한 안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해 계속 불안감을 느낀다”며 “피해자를 위한 법 개정을 통해 법적 공백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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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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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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