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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베개를 전자레인지에? 생각 말고 감각하라 [Weekend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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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展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정서, 시간과 공간
결국 '경계없음'을 탐구하기 위한 미장센


파이낸셜뉴스

아니카 이 '너의 손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베개 같아' 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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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테리아와 냄새, 튀긴 꽃...' 유기적이고 일시적인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더 나아가 인간중심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는 '감각의 실험실'이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삼성문화재단은 오는 12월 29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아니카 이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전(展)을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이산과 여성주의 등 사회적 이슈를 담아낸 작업으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미술관 전시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 10여년간 제작된 작품 33점이 출품된다. 전시명은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사용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특성을 차용했다.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을 반영하는 이 구절은 작가가 초기부터 각종 비인간 생물과 기계, 그리고 협업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자성(著者性)과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작업이 결국 '나와 타자의 경계 없음'에 대한 탐구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2세에 미국으로 이민 간 아니카 이에게 이번 전시는 특별하다. 선사 인류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가설과 조류 및 균류의 이동이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전시의 이론적 기반을 구성한다. 이처럼 물질적, 시간적, 정서적 차원을 아우르는 두 갈래의 탐구는 한인 교포로서 개인적 여정을 반영하고, 나아가 이주와 상호 연결성이라는 작업의 주제를 부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인 영상 작품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작가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空)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기존의 작업물을 데이터 삼아 훈련된 알고리즘이 작가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하며, 공동의 연구와 협업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유기적인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아니카 이는 이 작품에 대해 "우리의 경험은 3차원의 존재에 묶여 있지만, 인식이 높아지면 5차원의 양자장, 즉 순수한 의식과 에너지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신작인 '또 다른 너'(2024)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끝없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미러 형태의 작품 속에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미생물이 자라면서 연하게 색을 발한다. 평범한 미생물이 합성생물학을 통해 해파리나 산호와 같은 해양생물의 유전질을 계승하는 과정은 고대의 바다와 현재의 우리 사이의 연결지점을 드러낸다.

'너의 손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베개 같아'(2015)도 미생물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을 표현했는데, 코로나 등 보건 위기 상황에서 격리라는 불가피한 조치가 사회적 편견과 낙인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튀긴 꽃으로 만들어진 신작 '생물오손 조각'(2024) 연작은 2000년대 작업에서부터 등장한 튀긴 꽃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튀겨진 꽃의 기름진 외형과 시큼한 부패한 냄새는 일반적으로 꽃이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충돌한다.

이번 전시의 실험성을 잘 반영한 '방산충'(2023) 연작은 고생대 캄브리아기 화석에서도 발견되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인 해양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를 참조한다. 방산충의 형태를 닮은 모습과 마치 숨을 쉬듯 고동치는 조명,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렸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촉수는 유기체와 기계의 소통을 상상하는 작가의 '기계의 생물화' 개념을 반영한다.

이밖에 '공생적인 빵'(2014)은 장내 미생물군의 복잡성을 탐구한다. 부드럽게 빛나는 비누 조각에는 박테리아의 모습이 투사되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생물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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