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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공론화 나선 5·18 성폭력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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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국립트라우마센터서
성폭력 피해자 첫 '열매' 모임
피해자들 아픔 나누며 위로
'국군의날' 국회서 증언대회
정신적 손배 집단소송 준비
한국일보

지난달 29일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만난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10월 1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피해자 증언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광주=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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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수십 번도 더 잊어버리고 내려놓으려 했지만, 그것만큼은 안되더라구요. 이제라도 용기를 내 억울함을 풀고 싶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15명이 지난달 29일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만났다. 지난 6월 종결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조위) 조사에서 40여 년 만에 처음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이다. 진조위는 당시 성폭력 의혹 사례 52건을 모았고 이 중 19건을 조사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조위 조사에서 평생토록 응어리진 한(恨)을 토해낸 이들은 서로가 버팀목이 되기를 원했고 이날 '열매' 모임으로 첫발자국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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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폭력 피해자 열매 모임에 참석한 서지현 검사가 한 피해자를 끌어안은 채 위로하고 있다. 광주=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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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얼굴을 보자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어떤 피해자는 다리에 깊게 남은 자상이 눈에 띄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이도 있었다. 이날 모임은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 비위 사건을 폭로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38년 만인 2018년 이를 처음 공론화한 김선옥씨가 등불을 밝히면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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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만에 용기를 내 5·18 성폭행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김선옥씨가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모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광주=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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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삶은 상처투성이였다. 원망할 가해자를 찾지 못한 피해자들은 자기 자신을 학대했다. "왜 하필 그날 그 자리에 있었을까" 하는 자책 끝에 평생 집 밖에 나오길 거부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성폭력 트라우마에 아예 결혼을 포기한 이도 있었다.

이날 모임엔 피해자 대신 참석한 딸도 있었다. 그는 언니(첫째 딸)가 쓴 편지를 가져왔지만 끝내 읽지 못했고, 이다감 상담전문가가 대신 낭독했다. 이들은 편지에서 "어렸을 때 엄마는 마음이 아픈 사람, 우울증, 조현병으로 많이 힘들어하던 모습이었다"며 "32년 만에 엄마의 5·18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찢어지고 너무 슬펐다"고 토로했다. 이어 "저희 엄마처럼 피해를 겪고 살아오신 모든 분께 본인 탓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서 검사는 피해자들에게 "살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44년 전 당신을 괴롭혔던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그것은 가해자의 잘못이고 국가의 잘못"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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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광주=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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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도 싸우고 있었다. 한 피해자는 2020년 언론 인터뷰에서 5·18 당시 성폭력 사실을 공개한 이후 이어진 악성 댓글에 가족들까지 상처를 입었다. 너무나도 힘든 시기를 겪은 피해자의 자녀들이 피해 여성에게 성폭력 조사에 응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김선옥씨는 성폭력 사실을 공개한 후 스트레스에 시달려 공황장애와 난소암이 생겼고, 최근까지 항암 치료를 받았다. 정현순씨는 "사실 2~3년 전 정신적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해 재판을 했었는데, (성폭력 피해를 공개한) 지난 4개월이 재판을 준비하던 몇 년보다 더 힘들었다"며 "성폭력으로 생긴 트라우마가 내 세포 속에 박혀 못 나오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피해자들의 논의는 집단대응을 하자는 결의로 이어졌다. 이들은 국군의 날인 10월 1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피해자 증언대회를 갖고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나설 예정이다.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는 실체가 없다"는 왜곡된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서다. 정신적 손해배상을 위한 집단 소송도 준비 중이다. 김씨는 "저와 같이 용기를 내는 데 여러분도 똑같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우리가 떳떳한 피해자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끔 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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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다. 광주=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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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은 세 번에 걸쳐 사진을 찍었다. 첫 사진은 모두가 스카프로 얼굴을 가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과거를 뜻한다. 두 번째 사진은 절반만 가렸다. 피해자들을 향한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도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현재 이곳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다. 이날 공개되지 않을 마지막 사진은 모두가 스카프를 치우고 환하게 웃었다. 언젠가 성폭력 피해자들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얼굴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미래를 기약하면서다.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피해자는 이날 탐스러운 무화과 열매를 가져왔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열매다. 꽃을 피우지 못했어도 속이 꽉 들어찬 무화과는 피해자들을 닮아 있었다.



광주= 김진영 기자 wlsdud45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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