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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뉴라이트’의 기묘한 ‘이승만’ 활용법...자기모순과 왜곡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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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모습. 현수막에 ‘건국’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쓰여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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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 대한민국 30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공보처 발행.”

1948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관보 1호에 실린 문장이다. 당시 정부를 이끈 대통령은 이승만, 관보 내용은 제헌국회가 만든 헌법 전문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을 ‘대한민국 원년이 아닌,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닿는다. 초기 정부는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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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1일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 “대한민국 30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공보처 발행”이라고 적혀 있다./국가기록포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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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76년이 지났다. 이승만은 ‘건국절’ 논란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비판받는 ‘뉴라이트’와 한데 묶였다.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이승만은 일제에 맞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1945년 이전 이승만의 행보 역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는 뉴라이트 역사관과 전면 배치된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찾을 수 없는 반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해소하려 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데도 뉴라이트 세력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자기모순이거나 이들이 역사를 선별적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뉴라이트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외연을 확장했다. 이미 정부 산하 3대 역사 연구 기관으로 불리는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직에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임명됐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역시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뉴라이트와 관련 있다는 의혹을 받는다. 뉴라이트는 이제 1945년 광복과 1948년 건국의 가치를 따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이들이 역사적 기억을 어떻게 분해하고, 재조립하는지 짚어봤다.

뉴라이트는 누구인가


뉴라이트는 2004년 말을 기점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우파’라는 뜻을 가진 ‘뉴라이트’라는 말도 이즈음 언론에 등장했다.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특징을 보였다. 하나는 역사관, 또 다른 하나는 정치관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특징은 2005년 초 설립한 ‘교과서 포럼’의 활동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몰가치적 실증주의 역사관을 주장하며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민족주의, 자학사관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교과서 포럼 창립선언문 첫 구절이 “대한민국은 잘못 태어난 국가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역사교육에 투영하고 싶은 ‘가치’를 드러낸다. 실제로 이들의 활동은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 교과서’ 논란으로 번졌다. 역사학자 신주백은 논문 등을 통해 이러한 행보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친일파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라 비판했다.

뉴라이트 정치관의 특징은 표면적으로 기존 ‘보수’와 결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수’는 질서 유지와 점진적 개선을 주장하는 서구형 ‘보수’와는 의미가 다르다. 정해구 전 성공회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보수는 국가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시작은 반공주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냉전 등을 거치며 한국 보수의 가치는 ‘반공’에 맞춰졌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며, 반공주의가 일시적 위기를 맞는다. 이를 수습한 것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다. 국가이데올로기는 ‘반공’에 ‘경제성장’을 더한 것으로 확장됐다. 여기까지가 소위 올드라이트, 기존 보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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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정치관 분석/정해구 전 성공회대 교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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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는 색깔론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공주의’, IMF·세계경제위기 등으로 한계를 맞은 ‘성장주의’를 낡은 것으로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자유’를 꺼내 들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강조다. 시작은 역시 2004년이다. 그해 11월, 과거 운동권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연대가 창립됐다. 신지호 현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이 대표였다. 이 시점 이후 ‘뉴라이트’라는 용어를 명패에 사용하는 단체가 속속 만들어졌다. 기존 단체를 계승하고, 유사한 성격의 단체와는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뉴라이트 이념을 정립한 ‘뉴라이트 싱크넷’, 산재한 뉴라이트 단체들을 하나로 묶은 ‘뉴라이트 네트워크’, 이를 다시 계승·발전한 ‘뉴라이트 재단’, 현재의 ‘시대정신’까지가 그 계보다. 이들 단체에 교과서 포럼 등에서 활동한 학자 등이 합류해 사상적 근거를 강화했다. 실제로 뉴라이트 명패를 붙인 단체들에서는 익숙한 이름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창자로 평가받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김영호 현 통일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다른 대중운동 성격의 뉴라이트 단체도 나타났다. 김진홍 목사가 주축이 된 ‘뉴라이트 전국연합’이다.

뉴라이트는 역사·정치 분야 모두에서 각각 목소리를 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세력, ‘자유’를 강조하는 세력이 모두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썼다. 이로 인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유주의’가 한데 섞였다. 일각에서 뉴라이트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지나며 뉴라이트 정치관으로 무장한 세력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앞서 그들이 올드라이트라고 비판한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정해구 전 교수는 이미 2006년 뉴라이트가 올드라이트에 편입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기자와 통화에서 “주장에 설득력이 없어 뜯어보니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와 올드라이트의 ‘반공’이 다른 게 전혀 없었다”며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뉴라이트가 별도로 존속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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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저는 솔직히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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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 안착한 뉴라이트는 ‘친일’ 논란의 역사관과 계속 묶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치권 인사 중 본인이 ‘뉴라이트’라고 인정하는 인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8월 2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뉴라이트 지식인 선언 100명’에 이름을 올린 이유를 묻자 그는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 뉴라이트라고 이름을 쓴 것은 구태의연한 우파 보수를 벗어나서 신선하고 참신한 젊은 우파 보수 지식인이 되자는 의미였다”고 밝혔다. “1948년 8월 15일 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역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고 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29일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저는 솔직히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뉴라이트를 국가 권력자들이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모르쇠가 설명하는 것도 있다. 뉴라이트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닌 ‘반공’과 ‘자유’를 강조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공의 화신이자 한미동맹의 주창자이며 건국의 아버지로 포장된 ‘이승만’이 등장하는 이유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모순인가, 왜곡인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체할 이론적 배경은 다시 뉴라이트 학자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정부 수립기까지다. 이를 ‘독립운동’과 맞대 ‘건국운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안병직 명예교수는 2006년 뉴라이트재단 발족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이 출범부터 자주와 자생으로 출발한 것이 아닌, 국제관계 속에서 출발했고 대외협력관계를 통한 안보와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에도 한국 근현대사를 침략과 저항의 역사로만 규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주의 자주 노선에 맞선 글로벌리즘(국제주의)을 강조하겠다고 했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건국과 한미동맹을 이끈 이승만을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이는 ‘자유’(반공)를 강조하는 뉴라이트 정치관과도 부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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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한국자유총연맹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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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시도는 이미 한 차례 큰 파동을 겪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절’ 추진 논란이 일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철회됐다. 이후 15년 가까이 흘렀지만 당장 건국절을 추진해야 할 만큼 이승만의 업적이 추가로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에 뉴라이트가 어떤 방법으로 이승만을 재평가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사실 뉴라이트의 이론적 배경은 안 명예교수의 중진자본주의론이다. 저개발국이었던 한국의 1960년대 고도성장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 연원을 추적하다 보니 ‘일제강점기 고도성장이 있더라’는 식이다.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파생했다. 이를 ‘친일사관’으로 비판하자 뉴라이트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 반박했다. 자신들은 “일제 ‘때문에’가 아니라 일제 ‘동안에’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변동을 말한 것”이라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승만 재평가에 있어서도 여전히 이들이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소수 이론’으로라도 학계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제시한 수치와 통계가 반증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 ‘당위’나 ‘가치’를 주장하면 뉴라이트는 ‘정치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뉴라이트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승만의 생애를 살펴보면 의문은 더욱 커진다. 첫째로 1945년 이전 이승만의 ‘반일사상’과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생이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접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활동 등에 참여하다 박영효 정변 사건에 연루돼 1899년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만 5년 7개월 감옥생활 동안 그는 여러 집필활동을 한다. 우선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청일전기>라는 책이 있다. 당시 윤치호를 비롯한 이른바 개화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결과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기뻐했다. 그 결과 친일로 변절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승만은 <청일전기>에 “실상을 생각하면, 이는 진실로 일본의 영광이오, 대한의 수치”라고 적었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 태평양잡지사에서 출간됐다. 그동안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친일’이 아닌 ‘근대화 학습 과정’을 긍정한 것인 만큼 관계가 없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래도 문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감옥에서 독립에 관한 또 다른 원고를 집필한다. 결과물 <독립정신>에서 그는 “국권을 보호하는 일에 대하야 조금이라도 남을 의지하던지 혹 남의 힘을 빌어 일을 하고저 하는 자는 곧 나라를 마지막 팔고 천만고에 대역이라 부디 조심하며 부디 경계할지어다”라고 적는다. 즉 외세에 힘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은 외부세력에 의한 근대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외부로부터 달성 가능한 근대화를 막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심지어 광복 때까지 이를 깨치지 못한 둔재다. 이에 관한 뉴라이트의 이승만 비판을 기대했지만 찾아볼 수 없다.

둘째는 1948년 정부 수립에 관한 이승만의 인식 문제다. 이는 공문서에 사용된 ‘연호’ 논란으로 짚어볼 수 있다. 관보 제1호에 쓰인 대한민국 30년 외에도 1948년 9월 26일 담화나 1949년 10월 7일자 관보에 실린 개천절 경축사에서도 대한민국 30년, 31년 연호를 썼다. 이 시점은 1948년 9월 11일 단군기원연호법이 제헌국회에서 의결된 뒤였다. 대통령이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지칭하는 일이 반복되자 관보 역시 제5호까지 대한민국 30년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이를 무시하고 1948년 건국,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지칭하는 것은 ‘가치’가 아닌 ‘사실’로 말한다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맞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셋째는 ‘자유’(반공)를 위해 이승만이 한미동맹을 넘어 일본과의 협력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인식이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정부에도 한·미·일 동맹은 난제인데 일본과의 동맹을 용인하지 않는 국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남북 대립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인식의 뿌리로 삼은 것이 이승만이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미·일 협력 관계에서도 여전히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이후 발표된 담화문에선 일본에 관대한 미국을 비판하기도 한다. 1954년 8월 30일 발표한 담화문 제목은 ‘침략주의 일본은 증오의 대상, 자유 아주 국가는 미국의 대아정책을 주시’다. 핵심 내용은 “미국이 일본의 뒤를 밀어준다는 것은 태평양 동맹의 회원국가로서 유망한 아세아 민족들을 상실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뉴라이트와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기보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부각한 것에 가깝다. 뉴라이트는 연구자 모임이 아닌 정치집단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이승만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근원적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살아 돌아온다면 과연 뉴라이트의 생각에 동의할까”라는 것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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