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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불평등이 줄며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주장은 '정치적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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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세계불평등연구소의 2021년 <세계불 평등 보고서>를 보면, 상위 10% 인구가 전 세계 소득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 50% 인구의 소득 비율은 8%에 불과하다. 지금의 세계경제시스템을 유지하고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선의와 자선을 보태는 방식으로 이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까.

제이슨 히켈 바르셀로나자치대 환경과학기술연구소 교수의 <격차>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는 책이다. 국제 빈부격차는 식민지배, 쿠데타 등을 통한 부국의 폭력적 약탈 위에 건설됐고 부채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자유무역과 같은 제도를 통해 유지되고 있으며, 이를 깨지 않고 국제 빈부격차 해소를 논하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먼저 '부국이 주도하는 국제개발과 자선을 통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와 대결한다. '좋은 소식 이야기'는 현재의 세계경제시스템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게 만들게 하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며, 이를 구성하는 통계 자체도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저자가 제기하는 논점이다.

대표적인 수치가 국제 빈곤선이다. 세계은행은 1990년 최빈국의 빈곤선을 기준으로 '하루 소득 1.02 달러'를 국제 빈곤선으로 잡고, 이후 빈곤선 인상에 달러의 구매력 하락분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1990년에서 2005년 사이 통계상 빈곤인구가 4억 3700만 명 줄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빈곤인구 감소는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이뤄졌다.

빈곤선으로 다른 기준을 잡으면 전체 그림이 달라진다. 런던 신경제재단은 영아사망률을 세계 평균인 1000명당 30명 수준으로 줄이기 위해 필요한 하루 소득을 약 5.87달러로 본다. 이에 근거해 '하루 소득 5달러'를 빈곤선으로 잡으면, 빈곤인구는 1990년에서 2015년 사이 3억 7000만 명 이상 늘었다. 2010년 기준 빈곤인구는 약 43억 명에 달한다.

기아 통계도 마찬가지다. 유엔(UN)은 실내 좌식생활을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칼로리 섭취를 기아로 정의한다. 이에 따른 기아 기준은 '하루 1600~1800칼로리'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 좌식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형편이 못 된다. 인류는 매년 전 세계 인구를 하루 3000칼로리 이상 먹이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심각한 국제 빈부격차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한다. 가장 먼저 폭력과 약탈에 기초한 식민지배가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래 서구는 라틴아메리카의 자연 자원을 무력과 음모로 탈취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공짜 노동력을 확보했다. 이렇게 모인 자원은 서구 국가들이 군사력을 늘리고 타국에 대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쓰였다.

식민지배가 끝나가던 20세기 중반 빈국에서는 케인스주의의 부상과 수입대체 전략을 통한 산업화, 천연자원과 핵심자원의 국유화 시도 등이 일며 경제가 발전하고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칠레 등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구국가들이 빈국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재확보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지원하고 자국에 유리한 경제조치를 시행하게 한 데 따른 것이었다.

전형적 사례는 칠례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빵 가격을 낮추고,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실시한 아옌데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이후 칠레는 밀턴 프리드먼을 위시한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실험장이 돼 국영기업과 사회보장서비스의 민영화, 각종 보조금의 철폐 등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 경제가 무너지고 빈부격차가 심화됐다.

저자는 이어 지금 이 순간의 국제 빈부격차를 유지하는데 작용하고 있는 제도를 살핀다. 빈국이 진 부채와 이를 무기로 IMF(국제통화기금)가 강제한 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세계무역기구와 국력차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의 강제 등이다.

빈국의 부채 문제는 1970년대 고유가 상황에서 OPEC(석유수출국기구) 국가의 석유 달러가 미국 은행으로 흘러든 데서 시작됐다. 늘어난 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은행들은 빈국에 적극적 대출영업을 벌였다. 이후 서구 국가의 제조품에 글로벌 남반 국가의 천연자원보다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불균형한 무역 구조, 2차 오일쇼크, 불황에 따른 서부 국가의 수입 감소 등이 겹치며 빈국의 부채 상환 여력이 줄었다.

결국 멕시코가 1982년 800억 달러의 부채 중 일부에 대해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며 '제3세계 부채위기'가 터졌다. 미국은 멕시코에 부채 상환을 압박했고, G7 국가들은 IMF를 통한 개입에 나섰다. 부채위기에 처한 국가가 규제 완화, 무역장벽 철폐, 민영화, 화폐 긴축 등 구조조정에 동의하면 IMF의 긴급자금을 대출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부채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력이 줄었다.

1995년 등장한 WTO(세계무역기구)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부국이 주도한 WTO 출범 이후 낮은 관세, 자국산업 보조 중단, 해외투자 규제 완화 등은 국제무역 참여 국가가 따라야 할 표준적 제도가 됐다.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에게 어른과 같은 운동장에서 경쟁하라는 격이었다. WTO 분쟁해결 절차도 부국에 유리하다. WTO 제소에서 승리한 국가에는 무역제재 권한이 주어지는데, 제재의 힘은 경제규모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국에 유리한 세계경제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부자들의 자선에 기대는 방식으로 국제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2010년대 초 빈국의 연간 원조 이득이 1280억 달러에 불과한 반면, 빈국의 부채 이자상환으로 인한 부국의 소득은 2110억 달러, 불평등 교환으로 인한 부국의 이득은 2조 6660억 달러에 달한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부자들의 부가 국제 빈부격차를 유발하는 세계경제시스템에 기초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대책은 △빈국의 부채 탕감 △불공정한 투표권 분배 해소 등을 통한 세계은행·IMF·WTO 등의 민주화 △각국 중위소득의 50%를 기준으로 한 글로벌 최저임금 도입 △빈국의 기후변화 피해 보상 등이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로 기후위기를 지목하며 국제 빈곤을 없애기 위한 빈국의 발전을 꾀하는 동시에 부국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줄여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전체 소비를 감소시키는 어려운 과제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프레시안

▲<격차> (제이슨 히켈 지음, 김승진 옮김) ⓒ아를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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