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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30년 묵은 의료개혁 지체… ‘종합적 시스템 변화’가 답이다 [심층기획-의·정갈등 6개월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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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위기 극복 어떻게

응급실 내원 환자 44%가 경증·非응급

동네 병·의원 분산하면 여력 확보 가능

전공의 의존도 줄이고 수련 체계 개편

일반의 대상 진료면허 도입 대안 검토

정부 개혁에 반발하는 의료계 달래고

의대정원 확대·양질 교육 균형 맞춰야

정부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 1만2000여명이 수련을 포기한 지 20일로 꼬박 6개월이 지났다. 정부는 전국 병원에서 벌어지는 ‘환자 거부’ 등 응급실 위기 상황<세계일보 8월19일자 1·5면 기사 참조>에 대해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지난해보다 80명쯤 늘었지만 전공의 500명가량이 한꺼번에 이탈해 이전과 같은 진료는 힘들다”고 인정하면서도 “응급실을 찾은 경증·비응급 환자가 44%인데 이들을 동네 병·의원으로 분산하면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일보

의정갈등 장기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 여파로,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응급실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20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구급 차량이 응급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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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 등 응급의료체계의 문제점은 새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난 30여년간 의료개혁이 지체되면서 누적된 구조적 문제”라는 입장이다. 응급실 위기 상황은 다음달 추석 연휴를 고비로 악화나 진정 국면에 접어들 전망이다.

이번 위기는 정부가 털어놓은 것처럼 고질적인 응급실 진료 문제 등 병원 의료 시스템을 손볼 전기를 마련했다. 전공의가 30∼40%에 달했던 상급종합병원(상종병원)에 대한 구조전환처럼 응급의료도 전공의 의존도를 낮추고, 전원 시스템을 바꾸는 등 체계 개편이 절실하다. 아울러 필수의료 기피, 증원과 교육 시스템의 균형, 수련 대신 개원에 몰리는 전공의 등 수십년간 쌓여온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의료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정부 개혁 의지를 ‘의료농단’으로 치부하는 의료계를 먼저 다독이고, 증원을 떠받칠 교육 환경을 담보하는 등 종합적인 시스템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계일보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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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의존도 줄이고, 수련 본질적 개편

정부는 전공의 공백이 길어지자 ‘전공의 의존도를 줄인’ 의료시스템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전공의 비중이 높은 ‘빅5’ 등 상종병원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중증환자 중심으로 전환하고, 환자 부담을 달리해 경증환자를 2차병원 등으로 분산시키겠다는 것이다. 전공의 노동력에만 의존하지 않는 ‘전문의 중심 병원’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전문의와 교수를 훨씬 많이 뽑아 전공의가 파업해도 문제없이 돌아가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성환 대한공보의협의회장은 “전공의는 그동안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최저시급 이하로 해왔는데 이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전문의와 간호사를 고용해야 하기에 비용이 더 들 것”이라며 “수가 개편에 따른 건보료 인상이 불가피하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상종병원이 중증환자만 보면 교육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상종병원에서 암 수술만 교육하면 1차 진료를 원하는 전공의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종병원 구조전환 이후 ‘수익 담보’와 ‘전공의 대체 인력 확보’는 난제다. 중증·경증 질병 치료수가, 고난도 수술과 일반 치료수가 등에 큰 차이가 없는 구조를 개편하는 배경이다. 중하고 어려운 치료일수록 건강보험 재정에서 지원하는 비용이 큰 구조로 바꿔 나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에도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 아닌 총체적인 수가 인상과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건보료 인상이 절실한데 조세 저항이 불가피하다.

용인세브란스병원과 광명중앙대병원 등은 이미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대서울병원은 ‘돈 안 되는 진료과’까지 내세웠음에도 성공한 사례다. 지난해 5∼6월 뇌혈관병원, 대동맥혈관병원을 차례로 개원했고 이달 엄마아기병원까지 연다. 신경과·신경외과, 심장혈관 흉부외과,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기피 진료과를 강조한 것이다. 특히 수가가 낮고 수술에 6∼8시간씩 걸리는 흉부외과는 대표적인 적자 과인데 병원은 수술방 두곳을 대동맥류 수술을 위해 비웠다. 개원 1년 만에 800여건 수술을 해 ‘빅5’ 병원 등이 주목하고 있다.

전공의 공백을 진료지원(PA) 간호사로 메우기 위한 법안 추진에 대해 의사들은 법적 책임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일부 간호사들도 “업무만 늘어날 것”이라는 입장이라 조율이 절실하다. 대한간호협회는 전공의 이탈 6개월간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60% 이상은 전공의 업무를 강요받았다고 토로했다.

전공의 의존도를 낮춰도 전공의 배출이 끊기면 의사 교육시스템 붕괴를 부른다. 이에 전공의 교육 비용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는 등 수련 시스템 개편이 논의 중이다. 수련병원은 전공의 노동력에 덜 의지하고, 필수의료 등 정부가 원하는 수련 프로그램 독려가 가능한 구조다. 정부가 지도전문의 인건비 일부를 제공하고 병원은 전공의 업무를 줄여 교육에 집중하는 방안도 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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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면허 도입’ 등 새 대안들

정부 대책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새로운 방안들도 제시되고 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정책을 바꿀 경우 연쇄작용이 상당한데 정부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굉장히 단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펠로우(임상강사)까지 거친 전문의는 단독 개업보다 병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반대로 의대 졸업 후 2∼3년 정도 기본 수련을 받고 1차의료 의사로 개원하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필수의료에 안 가는 이유는 비필수 의료가 돈을 너무 많이 벌기 때문이기에 비필수 의료를 규제하는 게 핵심”이라며 “자기가 수련받은 전문분야만 의료행위를 허용해야 한다”고도 했다. 개업 면허뿐 아니라 의사면허만 있으면 모든 의료행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이날 독립적인 진료 역량이 부족한 일반의들을 대상으로 진료면허 도입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한정된 자원은 의학적 우선순위에 의해 쓰여야 한다”며 “환자들이 집중되는 서울 대형병원의 경우에는 ‘개인이 아닌 종합병원 이상의 기관이 의뢰해야 진료를 볼 수 있다’는 등의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모든 환자가 동네 의원의 진료의뢰서를 갖고 서울의 대형병원을 갈 수 있는 현재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과 교육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에 따르면 정원이 늘어난 32개 의대는 올해 3월 교육부에 제출한 ‘의대 정원 증원 수요 조사서’에 2025년부터 2030년까지 기초·임상의학 교수 4301명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9개 국립대 인원만 2363명으로, 교육부가 3년간 늘린다고 한 국립대 전임 교원 규모(1000명)의 두 배가 넘는다. 의대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대학 30곳이 2030년까지 7년간 의대 교육과 시설 개선에 필요하다고 추산한 금액은 6조5000억원에 달한다.

의대가 있는 서울의 한 대학 총장은 “정원이 몇배로 늘어난 대학은 현실적으로 교육이 쉽지 않다”며 “정부가 장밋빛 미래만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또다른 대학 총장은 “2026학년도 모집인원을 좀 더 조정하는 등 속도를 늦추며 교육 여건 개선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정재영·이정우·조희연·김유나·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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