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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기원전 6년 8월 백제와의 국경 정해진 마한… 온조왕 때 멸망했다는 건 낭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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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전남 나주 신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마한의 금동관.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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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역사작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를 고했다. 이로써 국경을 그어 정하니 북쪽은 패하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까지 하고 서쪽은 큰 바다에 닿으며 동쪽은 주양까지로 했다.”

백제 지배집단은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곳은 이미 마한의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처음에 백제는 마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더 선진적 문화를 가지고 있던 백제는 결국 마한을 정복하고 한반도 서남부를 모두 영역화하는 데 성공했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했기 때문에 후대에는 마한이 곧 백제라는 인식이 생겼다. 신라가 경주에 자리 잡은 사로국에서 출발해 진한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진한이 곧 신라라는 인식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해 삼한이라 부르고 삼한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할 때도 ‘한’을 ‘삼한’에서 가져왔으므로 현재 우리 국호인 대한민국도 삼한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삼한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자 중국에선 고구려도 삼한이라 부르곤 했는데, 7세기에 들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삼국을 같은 종족으로 보면서 하나의 단어로 묶으려 한 것이다. 신라 역시 자신들의 고구려, 백제 정복을 일통삼한이라는 표현으로 쓰면서 삼국과 삼한을 동일시했다. 그런데 이에 따라 고구려가 삼한이면 그중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생겼다. 중국 쪽에서는 고구려를 마한과 연결했다. 이 현상은 금나라 역사를 다룬 ‘금사’, 송나라 역사를 다룬 ‘송사’ 등에 나타난다. 해외에서는 부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신뢰할 수 있는지 잘 검토해야 한다.

중국의 인식은 당나라에서 유학한 최치원에게도 이어졌다. 그가 ‘마한은 즉 고구려’라고 언급함으로써 후대에 큰 혼선을 빚었다. 마한은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이 세웠기 때문에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의 역사가들은 고조선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일연이나 이승휴는 모두 고려가 마한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 없는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역사에 개입한 것이다.

마한이 온조왕 때 멸망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고 문헌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마한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고대사는 사료가 부정확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고고학 자료와 함께 살펴보아야 역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마한이 온조왕 때 멸망했다면 전라도 지역에서 나오는 옹관묘의 주인은 누가 되는 것일까?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던 우리의 고대 국가 중 하나다. 이런 사실은 고고학 증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마한의 역사를 비롯해 전라도 지역의 백제 역사까지 잘 정리하여 편찬한 ‘전라도 천년사’ 발간이 여러 단체의 항의로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지자체와 역사학자들의 노고가 깃든 이 책이 빨리 발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다고 학술서적의 발간을 저지하는 야만스러운 행태는 중지되어야 한다. 끝까지 못마땅하다면 그들 자신의 주장을 출간하면 될 일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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