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엘 하니예가 2009년 7월 가자지구 가자시티의 한 에배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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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예는 이스라엘이 하마스 격퇴전을 벌이고 있는 가자지구 난민촌에서 1962년 태어나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팔레스타인의 대(對)이스라엘 무장봉기인 인티파다를 계기로 1987년 10월 하마스가 결성될 때부터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다가 1989년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돼 투옥되면서 인지도가 높아져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강경파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국가 해법’으로 평화 공존을 모색하는 내용의 오슬로 협정이 1993년 체결되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중동 지역에 잠시 평화 무드가 조성되자 석방됐다. 이후 또 다른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본거지인 레바논으로 거처를 옮겨 하마스를 원격 지휘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각각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자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됐다.
특히 2006년 1월 실시된 팔레스타인 지방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하마스는 132석 중 74석을 석권하며 온건파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이끄는 파타당에 압승을 거뒀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하니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가 됐다. 강경파인 하니예는 테러 시도를 포기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거부했고, 온건파와도 대립했다. 이에 하니예는 자치정부 내각에서 이탈했고, 팔레스타인은 2007년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와 파타당이 통치하는 서안지구로 완전히 쪼개졌다.
가자지구는 길이 41㎞, 폭 10㎞에 불과하고 면적은 부산의 절반 정도(365㎢)에 불과한데 인구는 230만명에 이르는 세계 최고 밀도 인구 밀집 지역이다. 하니예는 이곳을 17년 동안 통치하면서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이스라엘의 패망’이라는 하마스의 기본 정치 노선을 바꾸지 않으며 이스라엘과의 무력 충돌을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지목됐다. 특히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가자지구 습격으로 이스라엘인 1500여 명이 죽거나 납치되면서 이스라엘의 ‘제거 1순위’가 됐다. 그는 13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올해 들어 세 명의 아들과 손주, 형제 자매 등 10명을 이스라엘 공습에 잃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하니예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을 따돌리기 위해 그는 카타르와 튀르키예 등의 고급 호텔 등을 오가며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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