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 한국에서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장정혁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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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1일. 충북 청주 충청대학교에서 ‘TFC 드림5’ 한일전이 열렸다. TFC는 당시 로드FC를 추격하는 위치에 있던 종합격투기 단체였다. 이날 경기는 소속 선수 5명과 일본 선수 5명이 대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장정혁 선수와 홋카이도 PFC의 니시카와 야마토 선수의 대결은 경기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탈북파이터’ 장정혁의 프로 데뷔 무대로 치러지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경기 전 대부분 전문가들은 홋카이도 PFC의 라이트급 챔피언이자 프로 전적 4승 4무의 무패 파이터 니시카와의 우승을 점쳤다. 그는 10년 넘게 하루 8~9시간씩 훈련에 매진할 정도로 성실한 선수였다. 손과 발 곳곳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엄청난 파워의 소유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반면 데뷔전을 치르는 장 씨는 ‘버리는 카드’ 정도로 여겨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니시카와는 공격적으로 돌진했다. 1라운드가 불과 30초가량 지났을 무렵 니시카와가 몸을 번개같이 돌리며 ‘백스핀블로(한 바퀴를 돌아 손등으로 타격하는 기술)’를 장 씨의 얼굴에 날렸다. 장 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니시카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장 씨를 올라탄 뒤 연신 주먹을 날렸다. 가까스로 뿌리치고 일어선 장 씨는 이미 다리가 풀린 것으로 보였다. 니시카와의 주먹은 이후에도 장 씨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갑자기 장 씨가 니시카와에게 달려들어 주먹 연타를 날렸다. 그렇게 서로 네다섯 차례에 걸쳐 주먹을 주고 받던 중 이변이 일어났다. 니시카와가 쓰러진 것이다. 즉시 벌떡 일어난 니시카와는 장 씨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둘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주먹을 주고받으며 난타전을 펼쳤다. 그러다 먼저 쓰러진 것은 니시카와였다. 장 씨가 주저앉았다가 일어나 니시카와를 다운시키기까지 걸린 역전의 시간은 불과 30초 정도였다.
데뷔 무대에서 일본 격투기의 신성 니시카와에게 첫번째이자 KO패를 안긴 장 씨는 한일 격투기 세계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장 씨의 예상 밖 선전으로 한국은 일본에게 최종 전적 3:2로 승리했다.
2024년 7월 장 씨(오른쪽)가 함께 운동하는 형과 함께 체육관 옥상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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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력의 비결
니시카와가 그 답을 들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장 씨가 최근 그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2024년 남북하나재단 주최로 열린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다.
장 씨는 당시 경기에 대해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일본 무패 챔피언과 프로 무대에 갓 올라온 아마추어의 대결이라 처음부터 제가 이길 가능성은 없었고, 저의 무모한 도전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기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상대 선수의 주먹에는 쌓인 경력만큼 빈틈이 없었고, 몇 번의 주먹이 오가면서 맞은 펀치에 다리힘은 풀렸다. 그러다 잠시 기절까지 했다.
이후 그는 어떻게 싸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 선수가 코뼈가 부러진 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상대측 코치와 감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어 심판이 그의 팔을 들어 올리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 씨는 “그날 제가 무패 챔피언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북한에서의 삶, 중국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에 온지 1년 정도 지난 2014년 부산을 찾은 장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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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부모
장 씨는 예외였다. 그의 유아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1997년생인 그는 북한의 최북단인 함북 종성군에 위치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정치범수용소가 있던 곳이었다. 1987년 5월 그곳에 갇혀 살던 수감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대거 학살한 뒤 수용소를 폐쇄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을 조직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아무 것도 없는 산골에 추방되다시피 모인 사람들이 잘 살리는 만무했다. 장 씨의 부모도 그렇게 옮겨온 농민이었다. 그런데 장 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컸다.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뒤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장씨의 외가 역시 종성군의 농촌지역에 있었는데, 이모와 외삼촌 등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핏덩이를 안고 들어온 어머니는 신세를 질 수 없다며 눈만 뜨면 돈을 벌러 나갔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귀가한 때면 “남의 씨를 왜 우리가 키워야 하냐. 보내버리라”고 소리치기 일쑤였다. 어린 장 씨는 그 때마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지난해 열린 시함에서 상대방을 향해 하이킥을 날리고 있는 장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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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두만강을 넘다
장 씨가 11살이 되던 2008년,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하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어머니는 중국에 갔다가 체포돼 북송된 뒤 증산교화소에 끌려가 3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에서 3년을 산 것은 기적에 다름아니었다. 다만 숨만 붙어있을 뿐 튼튼했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그래도 그는 집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외할아버지의 팔자타령도 점점 커져갔다. 어머니가 집에 누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장 씨가 갑상선 관련 병을 앓게 됐다. 북한에선 이 병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장 씨를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2009년 11월, 11살 장 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찬바람이 거세던 두만강 기슭에 섰다. 그곳에는 탈북을 꿈꾼 여인 서너 명도 있었다.
북한쪽 브로커는 강을 건너면 중국에서 다른 브로커가 마중나올 것이라고 했다. 새벽 5시, 장 씨는 목까지 차오르는 강을 건넜다. 물이 너무 차가워 살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강을 건너자 기다리던 브로커가 그들을 빈집으로 데려가 말린 옷으로 갈아입혔다. 다음날 일행은 차를 타고 연길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북에서 탈출한 이들은 브로커들에게 사람이 아닌 상품이었다. 연길 브로커는 빵을 하나씩 던져준 뒤 하루종일 전화통에 매달렸다. 중국에 가면 잘 먹을 줄 알았던 장 씨는 실망했다.
며칠이 지나자 집으로 찾아온 남자들이 여자들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브로커와 흥정을 했다. 같이 넘어온 여성들이 이후 하나둘씩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씨와 어머니가 남았다. 브로커는 어린 장 씨를 보며 “여자는 곱상하게 생겼는데 아들이 딸려 팔리지 않는다”며 툴툴댔다. 어머니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지만그를 떼어놓고 어머니만 팔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장 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만 아니면 엄마가 좋은 곳에 갈 건데, 나는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구나.”
17세였던 2014년, 대안학교에서 마련한 라디오 체험 시간에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는 장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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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족 마을에서의 삶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브로커가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집을 떠나자고 했다. 행선지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며칠에 걸쳐 기차나 버스를 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도시에 도착하자 브로커는 마중 나온 사람에게서 돈을 챙긴 뒤 사라졌다.
장 씨와 어머니는 다시 낡은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색시를 사왔다”며 온 마을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장 씨 모자를 동물 구경하듯 살펴봤다. 집이라고 소개받은 곳은 창고에 가까운 시설이었다. 바닥은 흙이 그대로 드러났고, 지붕은 볏짚이 씌워져 있었다.
돈을 주고 어머니를 데려온 한족 남자는 키가 160cm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40대 중년 사내였다. 칫솔질을 해본 적이 없는지 말을 할 때마다 역겨운 입 냄새가 몇 미터 밖까지 풍겼다. 중국을 몇 번 왔던 어머니도 조선족 사회만 경험했기에 지금 처한 상황에 절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이런 인간에게 팔려왔구나.” 장 씨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창고 같은 집에는 한족 남자와 그의 누나, 누나의 남편, 아들, 며느리 등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어딘지도 알 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온 마을이 감시병이라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 씨 모자가 살던 곳은 중국 랴오닝성에서도 가장 외진 농촌마을이었다. 그곳에서는 옥수수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먹었는데, 밥에다 종류를 알기 어려운 향신료를 넣었다. 그 탓에 장 씨는 구역질이 나 먹기조차 힘들었다.
그마저도 몇 달이 지나자 한족 사내는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장 씨는 13살이 되던 해 건설현장에 끌려나갔다. 하루 종일 벽돌을 날랐지만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임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일하다 발을 다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눈치 주기가 시작됐다. 다리가 낫자 이번에는 양계장으로 끌려갔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닭똥 치우기였다.
장 씨가 가끔 집에 돌아오면 다시 일을 나가 돈을 벌어오라는 독촉이 떨어졌다. 한족 사내는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장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중국에서도 그는 없어져야 하는 아이었다.
한족 사내는 “네가 밟고 있는 땅이 너의 땅이 아니고, 지금 보고 있는 하늘도 너의 하늘이 아니다”며 소리쳤다. 그 때마다 장 씨는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적잖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한족 사내의 눈 밖에 나는 즉시 북송될 가능성이 컸다. 오랜 교화소 생활로 몸이 망가진 어머니는 북송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문제였다.
장 씨는 이를 악물고 참다 견디기 어려우면 뒷산으로 올라가 눈에 보이는 대로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비록 지금은 어리지만 커서 저것들을 때려죽일 거야.” 당시로서는 그가 울분을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뿐이었다.
늘 힘든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킥복싱 챔피언이 된 직후 카페에서 잠시 여유를 즐기는 장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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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를 업고 산을 넘다
그런 생활이 2년 반쯤 지났을 때 그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그가 어렸을 때 탈북해 기억마저 희미했던 외삼촌이 한국에 가서 정착에 성공한 뒤 누나를 찾았고, 마침내 연락이 닿은 것이다.
2012년 여름 어느날 어머니가 장 씨에게 속삭였다. “이제 떠나자.” 온 마을이 잠든 새벽 모자는 집을 나섰다.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마음을 졸이며 걸어서 마을에서 벗어난 뒤 삼륜차를 얻어 타고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외삼촌이 주선한 브로커와 만난 뒤 또다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중국 국경까지 이동했다.
문제는 국경을 넘어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산에서 쓰러졌다. 일행을 따라가기 어려워진 어머니는 “너라도 넘어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죽자”며 그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후 장 씨는 어머니를 업고 산을 넘었다.
산을 넘고 국경을 건너 도착한 곳은 라오스였다. 라오스에서 다시 태국으로 들어갔고,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브로커가 가르쳐준 대로 주유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코리아, 코리아”라고 소리치니 경찰이 뛰쳐나왔다.
경찰에게 체포돼 끌려간 감옥에서 모자는 갈라졌다. 일행은 다 여성들이었고, 장 씨만 남자였다. 그는 중국과 마약거래를 하다가 잡혀온 범죄자들과 2주 동안 같은 방에서 살았다. 이후 경찰은 이들을 다시 탈북민만 따로 수감시킨 감옥으로 데려갔다.
100~130㎡ 크기의 공간에 1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은 쭈르려앉은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이 천정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로 더위를 견뎌야 했다. 좁고 더운 감방에서 어른들은 수시로 싸웠다.
코로나 기간은 체육관에서 운동하기 어려워 바다를 찾아 개별훈련을 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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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찾아온 우울증
한 달 정도 지났을 장 씨에게 한국행 순서가 돌아왔다. 한밤 중에 100명이 넘는 탈북민이 한꺼번에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승무원의 안내말이 들려왔다. 순간 그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기내식은 그가 처음 먹어본 한국 음식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일행 가운데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들이 공항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다고 소리치자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장 씨도 화장실을 찾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사기관과 하나원 생활을 거치며 6개월이 흘렀다. 장 씨는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밥도 맛있었고,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조사기관의 담당자 누나가 혼을 내고, 쌀쌀맞게 굴면서 남들에게 다 나눠준 빵을 그에게만 주지 않은 일이 유일하게 서운했다.
하나원에선 기숙형 학교에 다녔다. 여짓껏 공부를 해본 적이 없던 장 씨에게 선생님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3개월을 다니며 초등학교 졸업증을 받았다.
2013년 초 장 씨는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용인시에 임대주택을 받고 하나원을 나섰다. 자유의 땅을 경험하자 그동안 모자를 휘감고 있던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끊어졌다. 악으로 버티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거리의 화려한 건물은 공포로 다가왔고 길가의 사람들은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다시 쓰러졌다. 간도 안 좋고, 뼈도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픈 어머니를 보면서 장 씨도 우울증에 빠졌다. 자유의 땅에 왔지만 정작 아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방에 갇혀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화장실을 가다가 거실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봤다. 아들을 살리겠다고 생각 하나로 중국에서 그 많은 수모를 겪은 어머니가 이제 의지할 것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한겨레중학교를 찾아가 기숙사 생활을 하며 1년 남짓 공부한 뒤 중학교 졸업증도 받았다.
지난해 진행된 킥복싱 대회에서 챔피언 벨트를 받은 장 씨(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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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투기에 빠지다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낀 그에게 운동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중국에서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며 했던 것은 운동이 아니었다. 제대로 배우고자 체육관을 찾았지만 “나이가 많아 너무 늦었다”거나 “기본기가 모자란다”거나 “소질이 없어 어렵다”는 거절만 돌아왔다.
하지만 운동 이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만났다. 거기에서는 그에게 “할 수 있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꿈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날개가 새로 생긴 듯 기뻤다.
2016년 그는 여명학교 학생이 됐다. 복싱 글러브를 처음 끼는 순간 벅차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낮에 공부하고 저녁에 글러브를 낀 채 운동하고, 한밤에는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스파링 도중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멍드는 일상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몇 십 배 더 고통스러웠던 중국의 추억과 멀어지는 일은 이것뿐이라며 참아냈다.
그러던 중 TV에서 종합격투기를 보게 됐다. 문득 “내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프로선수가 되면 뭔가 고독했던 삶에도 변화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명학교 시절 그는 일반 체육관에 다니며 운동을 했는데, 어느 날 공중파 방송에서 연락이 왔다. 탈북청소년으로서 프로선수를 꿈꾸는 그가 특이했던 것이다. 그 방송에서 장 씨는 프로격투기 선수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방송 후 몇 달 뒤 운동하는 그를 유심히 보던 사람이 “네가 방송에서 격투기 하겠다고 했던 애구나”라며 말을 걸어왔다. 이어 그는 장 씨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 뒤 “신체가 나쁘진 않네. 한번 우리 체육관에 와봐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당시 19세였던 장 씨의 키는 174㎝였고, 온몸은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는 격투기 소속사에 다니게 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싸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훈련생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체육관에 들어선 첫날 그는 맞는 것부터 배웠다. 1년 동안 코피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날아드는 주먹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수준이 됐다.
처음 관악산을 찾아 인터벌 훈련을 할 때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파른 경사와 계단 200m를 전력 질주해 뛰어올라가는 과정을 17번 연속으로 해야만 했다. 일반인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질주를 장 씨는 첫날 이를 악물고 해냈다. 그리고 다음날 먹지도 걷지도 못했다.
고된 훈련이 끝난 그에겐 또 막내의 역할이 기다렸다. 체육관을 청소하고, 외지 훈련 때는 혼자서 고기를 굽고 설거지도 도맡아야 했다. 후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그보다 늦게 들어왔던 훈련생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나가기 일쑤였다. 대부분 내로라하는 특수부대 출신에 운동선수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매 맞고 목이 졸리는 격투기 훈련 과정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장 씨는 막내 생활을 3년이나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남들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도 겪어야 했다. “너는 북한 사람이라 이것밖에 못 한다”거나 “북한 사람이 이런 것도 잘 하느냐”, “빨갱이라 빨간 옷을 입느냐”는 등의 터무니 없는 말들이었다.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았지만 스스로에게 질 수 없다는 각오로 견뎌냈다. 당시 그의 목표는 “하루만 버티자”였다.
평소에도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낙하산을 뒤에 매달고 달리는 훈련을 반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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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챔피언 벨트
격투기 선수가 프로로 인정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아마추어 시합에서 3~4승을 해야 하고, 세미프로 경기에서도 다시 3회 승리를 거둬야만 한다. 2018년 니시카와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장 씨는 프로선수가 됐다.
참고로 니시카와 선수는 이후 한국 선수와 다섯 번 더 경기를 했는데 모두 KO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글로벌 격투기 단체인 PFL로 건너가 프로 전적 20승 이상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결국 장 씨만이 그에게 유일한 KO패를 안긴 것이다.
프로 격투기는 다양한 레벨의 단체들로 구성돼 있다.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단체가 미국의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UFC)이다. 그리고 나라별로 다양한 격투기단체가 존재한다. 한국에는 로드 FC, TFC 등 약 8~9개의 단체가 있다.
장 씨는 현재 한국의 떠오르는 신생 격투기 단체인 ‘블랙컴뱃’ 소속이다. 데뷔 전 승리 이후 지금까지 장 씨의 공식기록은 5승 3패 3무. 1년에 경기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 가끔 다른 경기도 뛴다.
장 씨는 2022년 9월 한국킥복싱협회가 주최하는 전국 킥복싱 대회에도 참가했다. 상대는 10승 1패의 전적을 가진 킥복싱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종합격투기는 강했다. 장 씨는 주특기도 아닌 킥복싱에서 승리했고, 현재까지 한국 킥복싱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7월엔 일본 격투기 단체 ACF가 주관한 대회에 참가해 웰터급 챔피언이 됐다.
사람들은 그를 ‘탈북파이터’라고 부른다. 장 씨는 이를 내세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두 개의 챔피언 벨트를 소유한 그가 항상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모든 운동선수에게 슬럼프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특히 지난해 어머니가 혈액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슬럼프가 찾아온 지난해 2경기에서 2번 다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올해 3번 경기의 경기에서 그는 모두 이겼다.
최정상의 목표는 아직 앞에 있다. 장 씨의 얼굴에는 승리를 향한 집념이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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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증명
종합격투기 선수는 늘 배고픈 삶을 산다. 격투기엔 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UFC 경기에 출전하면 많은 ‘파이트머니(경기 1회당 받는 금액)’를 받을 수 있다. 나머지 하위 리그는 몇 달 준비해 출전해도 파이트머니가 많아봤자 수백 만 원에 불과하다.
항암 치료 중인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한 비용 부담도 적잖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장 씨는 훈련이 끝난 뒤 일당직 노동이나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격투기 선수와 마찬가지로 장 씨도 UFC 진출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 최고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자신처럼 어려운 역경을 거쳐 탈북한 후배들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격투기 선수의 전성기는 30세~33세 사이다. 나는 현재 27세로, 전성기를 맞지 않았다. 훗날 후회하고 싶진 않다. 탈북한 후배들에게도 하면 된다는 희망도 주고 싶다.”
그는 요즘도 오전과 오후에 3~4시간씩 훈련한다. 예전 혀를 빼물어야 했던 관악산 인터벌 코스 훈련은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훈련 강도를 높여 낙하산을 뒤에 매달고 일주일에 1~2회씩 달린다.
그의 좌우명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뿐이다’는 니체의 말이다. 세계 최고의 격투기 괴물들만 모이는 UFC으로 올라가기 위한 벽은 매우 높다. 그가 그 벽을 넘어설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장 씨는 이미 20대에 큰 자산을 쌓았다. 죽을 고비를 몇 번씩 경험했던 지나온 삶의 체험이다. 세계의 정상을 향해 온몸과 청춘을 불살라본 사람은 많지 않다. 격투기 선수의 최전성기를 지난다고 해도 그는 고작 30대 초반일 따름이다.
북한과 중국에서 뼈저리게 ‘존재의 회의’를 느껴온 그에게 앞으로의 삶은 ‘존재의 증명’ 과정이 될 것이다. 20대의 장정혁은 이미 자신을 너무나 멋지게 증명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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