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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 (금)

대법 “성적지향 달라도 권리 동등”…동성 커플 품을 제도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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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배우자 건보 피부양자 인정’ 판결이 던진 과제

경향신문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동성 부부 소성욱(왼쪽)·김용민씨가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조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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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구성 변화에 대응 필요
제도 밖 가족 보호는 의무”

톨스토이 소설 인용하며
“성적지향 다른 삶 폄훼 안돼”
민법상 ‘배우자’ 범위 유지 속
“입법 조치 시급” 보충의견

대법원이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것은 전통적인 가족제도 변화의 시대 흐름을 반영한 판결로 볼 수 있다. 소성욱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소씨를 김용민씨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라’는 지난 18일의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 대법관)의 확정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은 동성 동반자 관계의 가정공동체를 달리 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부양자 제도 자체의 배경과 역사를 짚으면서 동성 배우자라는 이유로 피부양자 대상에서 배제돼선 안 된다고 봤다. 1977년 1월부터 시행된 의료보험법에 따라 세워진 피부양자 제도는 그 범위가 계속 변해왔다. 부계 혈통 중심의 피부양자 제도는 산업화에 따른 핵가족화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로 부양자 주체는 물론이고 피부양자 범위가 유연하게 확대됐다. 1980년대 이후 미혼 여성의 부양 역할을 인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혼·재혼, 미혼 가정 등에 따라서도 변화했다.

대법원은 피부양자 제도의 근간이 되는 ‘가족’의 구성이 시대 흐름과 삶의 양상 변화에 따른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동성 커플이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피부양자 자격을 따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선 안 된다는 취지의 판단이다. 동거·부양·정조 의무를 바탕으로 부부 공동생활에 준할 정도의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한다면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이를 둬선 안 된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은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는 저출생, 인구 고령화 등과 더불어 더욱 다양하게 변화하는 가족 결합과 생활실태에 부응해야 할 필요성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오늘날 가족 결합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극 대응할 것이 요구된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사회보장 제도에서 차별을 받는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고 봤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김상환·오경미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내고 성적지향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택해 맺는 ‘동반자 관계’의 가족공동체가 제도 바깥으로 내몰려선 안 된다고 했다. 전통적인 혼인 제도를 기준으로 할 때 ‘동반자 관계’는 쉽게 제도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들 대법관은 동성 간 결합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가 등장하는 현대사회 흐름에서 ‘제도 밖 가족공동체’를 보호할 의무는 국가에 있다고 짚었다.

이들은 “사회질서와 공공복리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를 적극 수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건전성을 강화해 민주주의의 제도를 발전시키고, 사회 구성원들의 궁극적인 복리를 증진한다”고 했다.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인용하면서 개인의 타고난 성향과 선택, 결단에 대해 사회적 처우가 달라져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당 소설에는 한 여성이 자신이 낳지 않은 쌍둥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가정공동체를 꾸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쌍둥이가 각자 다른 성적지향을 지닐 때 각 가정공동체에서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마땅히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문했다. 보충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그 누구의 가정공동체도 타인이나 국가에 의해 폄훼되어도 괜찮은 것은 없다”고 밝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동성결혼 자체를 판단하거나 민법상 ‘배우자’의 범위를 해석·확장하는 데까지 나아간 건 아니다. 보충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우리 사회 내에 남아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선 “입법 조치가 시급하다”고 했다.

법원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각종 사회 제도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건 세계적인 추세다. 일본 대법원은 지난 3월 살해당한 남성의 동성 배우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범죄피해자구조금 수급 자격 인정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항소심 재판부에 사건을 돌려보냈다.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구조금 지급을 거부한 처분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일부 도시에서 성소수자 커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파트너십’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동성 결혼 자체를 합법화한 건 아니다. 일본에선 동성 커플 불인정은 헌법 위반이라는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2019년 2월 도쿄·삿포로 지방재판소를 시작으로 나고야·후쿠오카 지방재판소에서 ‘동성 결혼 금지’를 규정한 헌법이 위헌 혹은 위헌 상태라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 3월엔 도쿄·삿포로 항소심 재판부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이 선고됐다.

이런 추세 속에서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는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처음으로 넓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종교단체 반발에 가로막힌 차별금지법 제정에 탄력이 붙을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본격 레이스를 이제 시작한 것 같다”며 “동성혼 법제화로 우리 사회가 더 당당하게 성소수자 권리 보장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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