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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는 국가였다”···‘국보법 위반’ 전승일 감독 재심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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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그린 걸개그림에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

“폭력적 연행·불법구금에 정신적 트라우마 상당”

전 감독 “국가보안법 악용한 자들이 범죄자”

경향신문

전승일 감독이 지난달 1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개시청구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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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차 두 대가 제 곁으로 들이닥쳤습니다. 7~8명 정도 되는 수사관들이 튀어나왔고, 저는 대낮 길거리에서 집단구타를 당했습니다. 얼굴은 천으로 둘러싸인 채 차 바닥에 짓눌려 있었고,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강을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였습니다.”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김한철 판사는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승일 감독(59)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문을 진행했다. 법정에 출석한 전 감독은 “전후 상황을 기억나는 정도만 말해줄 수 있냐”는 김 판사의 질문에 이 같이 일목요연하게 답했다.

전 감독은 1989년 대학생 시절 ‘민족해방운동사’ 대형 걸개그림을 그려 전시했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에 끌려갔다. 공안당국은 전 감독의 그림이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표현물이라고 봤다. 전 감독은 취조실에 구금돼 “구속이 연장됐다”는 통보만 받으며 19일 내내 갖은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다. 2년 뒤 전 감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 전 감독은 민주화보상법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지만, 과거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명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에 전 감독 측은 “강제연행과 불법구금에 이은 부당한 유죄 판결이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공안당국은 당시 공문서에 전 감독을 ‘임의동행’했다고 기재했으나, 전 감독은 수사관들에 의한 ‘강제연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연행 뒤에는 당시 형사소송법에 따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전 감독이 자유로이 퇴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불법구금해서 고문을 이어갔다. 동의도 없이 구금은 연장됐다. 또 전 감독의 진술, 일기, 편지 등을 통해 공안당국이 가혹행위를 일삼았던 사실이 확인된다고 했다.

전 감독 측 대리인 이종훈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35년이 지난 일임에도 피고인은 지금까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며 “부당한 국가기관의 폭력적 연행과 불법구금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부당함을 해소하려는 취지로 재심을 청구했다”고 말했다.

전 감독은 최후진술에서 “이 사건은 전승일이라는 한 개인에 국한된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인권에 대한 얘기”라며 “국가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다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범죄자는 제가 아니다. 저를 끌고 가서 구타하고, 고문하고, 국가보안법을 악용한 그자들이 범죄자다”라고 말했다.

김 판사는 다음달 23일까지 재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 6·10 민주항쟁 37년, ‘포스트 트라우마’ 전승일 감독 재심청구 나선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6101711001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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