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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1 (토)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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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역사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1898)



지방의 작은 귀족. 애매한 신분이었다. 반체제 운동에 공감하기에는 신분이 높았고,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기에는 신분이 낮았다. 권태에 빠져 젊은 날을 보냈다. 대학을 이곳저곳 옮겨 다녔고, 결투도 수십차례 했다. 영지에 틀어박혀 비료 농법에도 한동안 몰두했다. 무슨 일을 하건 곧 싫증을 냈다.



지역구에 출마해 프로이센 의회의 의원이 됐다. 얼마 뒤 1848년 혁명이 터졌다. 혁명에 반발하는 강경 보수 정치인이 드물다 보니 비스마르크의 입장이 눈에 띄었다. 외교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862년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자, 이에 맞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은 비스마르크를 중용했다. 이렇게 프로이센의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철과 피가 필요하다”고 연설해 ‘철혈 수상’으로 불렸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다(보오전쟁). 1870년 프랑스와 전쟁을 바라고 꼼수를 썼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이 프랑스 대사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일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보냈는데, 비스마르크는 전보에서 몇 단어를 지워, 빌헬름 왕이 프랑스 대사를 모욕한 듯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 7월13일의 엠스 전보 사건. 프랑스의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한 날이 7월19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크게 승리했다.



1871년 독일 통일을 선언했다. 빌헬름 왕은 빌헬름 1세 황제가 됐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총리가 됐다. 강경 보수 비스마르크는 중도파(가톨릭) 및 좌파(사민당)와 싸웠다. 그러면서도 세계 최초로 복지 정책을 도입했다. 오늘날 보수 일부가 싫어하는 다양한 사회복지 제도는 비스마르크의 유산이다.



독일이 국외 식민지를 경영하는 일에 처음에 반대하다가, 나중에 아프리카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1884년에는 베를린 회의를 주재했다. 유럽 여러 나라가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를 나눠 먹는 회의였다.



1888년에 황제가 죽었다. 젊은 황제와는 사이가 나빴다. 말년에 권력에서 밀려나 분을 삭이며 지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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