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7 (월)

[outlook] 극우 호랑이 피했지만…프랑스 더 험한 산으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극우파를 견제하기 위해 중도-좌파 공조로 만들어진 ‘공화국 전선’은 건재했다. 극우 진영의 국민연합(RN)이 압승할 것으로 예상되던 프랑스 조기총선 결선투표에서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이 예상을 깨고 하원 577석 중 182석을 차지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 여당인 앙상블(ENS)이 168석으로 제2당의 자리를 굳혔다. 제1차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하며 정국 주도의 희망을 가졌던 국민연합은 143석을 차지해 의석수를 크게 불렸지만 제3당에 머물렀다.

유럽의회 선거 참패 이후 의회 해산과 조기총선이라는 충격요법으로 정치적 도박을 감행한 마크롱이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당도 과반수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동거 정부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마크롱으로서는 호랑이는 피했지만 첩첩산중으로 들어간 형국이다.

중앙일보

김영옥 기자


긴 슬럼프에 빠졌던 좌파연합은 오랜만에 다시 정치적 주도권에 다가갔다. 전통을 자랑하던 프랑스 사회당(PS)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집권기 이후 몰락하다시피 침체기를 겪었고, 강경 노선의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에 좌파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조기 총선이 발표되고 나서 ‘굴복하지않는프랑스’, 녹색당(EELV), 프랑스공산당(PCF), 사회당(PS)을 아우르는 범좌파 진영은 신민중전선을 형성하며 세력을 결집하는 한편, 극우파에 맞선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1차 투표가 끝난 후 중도 진영의 여당과 200석이 넘는 선거 공조를 통해 국민연합 후보와의 경쟁력을 높인 ‘공화국 전선’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100석 이하로 몰락하며 군소정당화될 것을 우려했던 마크롱의 중도 진영은 예상보다 다행스러운 결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245석에서 168석으로 내려앉으며 제1당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했다.



좌파·범여·극우 ‘불안한 3각구도’첫 내각부터 난산 예고



중앙일보

지난 7일(현지시간) 프랑스 총선 결선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이 3당으로 밀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화국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며 축하하고 있다. 이날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이 1당에 올랐고,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범여권이 2당이 됐다. [AF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도 진영을 받쳐주던 우파 공화당은 선거 직전 내홍으로 당이 분열되며 45석으로 더욱 축소됐다.

극우 정당 견제라는 조기 총선의 목표는 1차로 달성됐다. 하지만 이제 국민연합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권 중심부에 한발 더 다가섰다. 마크롱의 입장에서는 극좌 및 좌파 진영과 손잡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과 이민 문제에서는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연금개혁을 포함한 친기업 성향의 정책들은 좌파 진영으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좌파연합이 제1당으로 올라왔다는 소식에 시장은 움찔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서양 관계와 같은 굵직한 현안을 앞에 두고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여 온 프랑스와 ‘어느 발로 춤을 추어야 할지’ 주변국들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프랑스는 연립정부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다. 강력한 대통령제하에서 좌파와 우파 진영 간의 선거연합은 종종 이루어지지만, 유럽의 다당제 국가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연립정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선거 연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되기 마련이다. 3년이라는 대통령의 잔여 임기와, 과반수를 갖지 못한 좌파·중도·극우파 간의 3각 구도는 불안한 동거를 예고한다. 대통령의 권력도 약화되는 반면, 과반수의 결의로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이 있는 한 총리의 지위 역시 항시 위태로워지게 된다. 깨지기 쉬운 권력 균형을 이어나가야 한다.

특히 좌파연합에는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모여 있고, 이미 여러 상반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좌파연합의 최대 주주인 장 뤼크 멜랑숑은 유력한 총리 후보이기는 하지만 극단적 이미지와 반유대주의로 인해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동거정부 아래의 총리직은 차기 대권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든 성배가 될 가능성도 크다.

정치 신예로 등장했던 마크롱에게는 오랜 정치 동료가 없다. 정치적 부채가 없다는 것은 개혁 정치를 하는 데 장점일 수도 있지만, 위기 상황에 있어서 고립될 위험성도 높다. 독단적인 조기 총선의 결정은 주위의 많은 정치적 동지들을 사지로 몰아넣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혼자서 등장한 것처럼 혼자서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엘리트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한 것도 여전히 대중정치인로서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무모할 정도로 개혁 정책을 정면돌파해 온 데에는 특유의 추진력과 함께 정치적 운도 따랐다. 하지만 이제 펼쳐진 길은 승부사 마크롱도 가 보지 않은 길이고, 친숙한 동지 대신 새로운 적들과 맞부딪치게 된다.

보다 근본적인 도전은 정치 체제 안에도 있다. 이원집정제는 종종 강력한 대통령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권력 분산의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 있어 대통령과 총리가 이원화되는 것은 한쪽으로 권력의 무게중심이 잡혀있지 않은 경우 불협화음과 정치적 에너지 소모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세 번의 동거정부 경험이 이를 말해 준다. 적어도 국민연합과의 최악의 동거를 피하게 된 마크롱에게 총리 임명을 위한 또 한 번의 어려운 선택이 주어졌다.

중앙일보

◆이재승 교수=예일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유럽연합(EU) 장 모네 석좌교수와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재승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