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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예술과 오늘]K팝 위기론이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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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음계도 잘 못 짚는 내가 실용음악학원에 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K팝 칼럼니스트’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있으니 기초 작곡 과정은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직장 근처 가장 큰 지하철역으로 주소지를 설정하고 검색하니 수십곳이 나왔다. 그중 얼마나 많은 아이돌을 배출했는지 필사적으로 홍보하는 학원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돌을 많이 배출했다는 건 그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상담만 먼저 받아보려 했으나 수강생들이 ‘표정 연습’을 하는 전신거울이 비치된 작은 방, 곳곳에 붙은 기획사 내방 오디션 전단을 보고 바로 작곡 입문반에 등록했다. 작곡은 핑계이고 아이돌 지망생의 세계가 궁금했다. 입문반 월 수강료는 현직 작곡가 주 1회 수업에 50만원이었다. 가장 싼 코스였다. 댄스와 보컬을 기본으로 과목을 추가하고, 외국어 실력도 따로 쌓아야 하는 지망생들은 의대 입시에 버금가는 사교육비를 들이고 있을 것이다.

체계도, 교육도 과할 정도로 본격적이었다. 아이돌 출신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고, 200여명이 속한 단톡방엔 기획사가 직접 방문해 여는 오디션 일정이 끝없이 올라왔다. 하루는 학원에서 열린 기획사 신인개발팀 특강에 갔다. 수강생들은 오디션 경험이 많은지 ‘3차 오디션’에선 어떤 분위기의 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인지 같은 세세한 질문을 했다. 학원 오디션에서 통과하면 기획사로 불려가고, 결과에 따라 또 오디션을 보는 방식이란 걸 알게 됐다. 캐스팅 디렉터들은 교복 입은 앳된 수강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비주얼과 ‘자기관리(다이어트)’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도 하나 물었다. “1년에 몇명이나 오디션을 보나요?” 답은 “셀 수 없이 많이”였다. 질문을 하고 후회했다. 강의실 불청객이던 내게도 그 답이 사무칠 만큼 서글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기획사 소속 연습생 수는 1170명이다. 통계에 잡히는 인원만 이 정도다. 연습생 문턱을 넘지 못한 지망생 수를 더하면 수천명 규모가 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지망생이 가계를 헐어 아이돌 사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는 K팝 아카데미인 ‘SM유니버스’를 대치동에 개업했다. 아이돌 정규 과정의 경우 한 학기 비용이 최대 1000여만원이고 자퇴도 불사해야 한다. 가장 유서 깊은 기획사가 좁쌀만 한 성공 가능성에 인생을 걸도록 희망고문하는 이 상황은, 아이돌 지망생이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처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기 의지로 도전하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학교까지 그만두고 뛰어들어도 결국 데뷔하지 못할 청소년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이 불합리한 구조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건 기획사다. K팝의 세계적 성공으로 지망생이 늘어나며 사교육 시장이 커지고, 전체적인 실력이 상향 평준화됐다. 최근 기획사가 ‘신인 같지 않은 신인’을 데뷔시켜 빠르게 수익을 내는 상황은 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방송에 내보내도 될 만큼 실력 있는 연습생이 많아지며 오디션 프로그램도 늘어나고 있다. 업계의 절대 갑들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아이돌 지망생을 K팝 산업의 공짜 부품처럼 대하고 있다. 이 일방적인 관계에서 불합리한 전속계약을 맺고, 유튜브 방송에서 성희롱을 당해도 웃음으로 무마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필연적이다. 무한 경쟁의 비용과 책임을 개인이 떠안는 구조가 계속되는 한 K팝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짜 반짝임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K팝 위기론이 고개를 드는 또 하나의 배경이다.

경향신문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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