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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삶의 향기] 축제에 초대받은 듯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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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황주리 화가


햇빛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잠시 졸다 깨면 눈앞의 대형 캔버스가 “어디 한번 그려봐” 한다. 30여 년 전 자유의 여신상이 내다보이는 뉴욕 맨해튼의 작업실 풍경이다. 오디오에서 니나 시몬의 ‘Don’t smoke in bed’가 흘러나온다. 그 시절 그 노래를 참 좋아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아직 꽤 있을 때였다.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떠나는 여자, 어디 떠나면서 할 말이 그것뿐이겠는가? 그 짧은 문장 안에 수많은 말이 들어있을 것이다.

2024년 7월의 첫날, 책을 읽다가 잠시 졸다가 깨니 문득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금 들으니 갑자기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지금이 언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니나 시몬의 호소력 짙은 노래에 이어 라디오 진행자가 읽어주는 하루키의 문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백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독재자들 전쟁으로 세상 위협

북한 오물 풍선의 악몽 펼쳐져

그래도 삶은 언제나 가치로워

중앙일보

그림=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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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에 꽂혀 문득 현실로 돌아오니 지금의 작업실에선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관악산의 산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한강 변이지만 3층이라 11월이 되어야 숲의 초록이 다 지고 강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은 강물보다 산 능선이 좋다. 왠지 믿음직하게 느껴진다. 믿음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나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진화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내 안의 산 능선들과 강물들이 흘러넘쳐 모든 건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이 든 지 오래다. 심지어는 슬슬 타인이 다 ‘나’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의 좋은 모습을 만난 것 같아 유쾌해지고, 오만방자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내 못생긴 구석을 봐버린 것 같아서 울적해진다. 착한 당신도 나다. 재수 없는 당신도 나다. 재수 없는 말만 하는 당신도 바로 나다. 그 맞는 말이 다 틀린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당신도 바로 나다. 나는 겸허하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재수 없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화해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를 화해란, 지구의 언어가 아닌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쓴 노트를 뒤적이다가 언젠가 내가 쓴 실감 나는 글을 발견했다.

“며칠 전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세상을 떠나고 없는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꿈이었다. 돌리면 빙빙 돌아가는 중국 음식점의 커다란 원형 식탁 앞에 다들 앉아있는데, 식사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중에는 외할머니, 아버지, 동생, 이모부,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 몇 년 전 세상 떠난 초등학교 동창 등 한 스무 명쯤이 둘러앉아 있었고, 꿈에도 그리던 애견 베티가 생전처럼 발치에 앉아있었다. 내가 어느새 환갑이라는 사실은 꿈속에서 더 실감이 났다. 일찍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늙지 않은 사람들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음식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도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손님 중에는 살아있는 내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번호표를 받아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것일 뿐, 산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죽음을 이미 경험한 분들에게 저세상에 관해 묻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분들이 매 순간 깜짝 놀라게 달라지는 이승을 더 궁금해할 것만 같았던 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화가 이만익 선생님이 축사를 해주셨는데 내용은 대충 이랬다. ‘삶은 시간 예술이다. 지나가는 매 순간을 색칠해라. 정성껏 온 마음으로.’ 깨 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말 며칠 뒤면 내 나이 환갑이다.”

이 글을 쓴 뒤로 7년이 또 지났다. 꿈이다. 세월이 빨리 가버린 것처럼 모진 꿈이 있을까? 저 먼 별까지 맨발로 걸어가는 빈센트 반 고흐의 고독한 꿈을 떠올린다. 고흐가 머물렀던 정신병원 병실의 벽에는 “나는 제정신이다”라고 씌어있었다 한다. 앞서가는 정신은 늘 제정신이다. 제정신이 아닌 건 이 시대에도 전쟁으로 세상을 위협하는 독재자들이다.

문득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맛있는 음식 풍선은 아니라 해도 오물 풍선은 심하게 진부하다. 결혼할 때 하얀 드레스를 입는 것도 반동으로 금지되며, 청소년들이 남한 드라마를 보다가 들키면 총살당하는 나라, 그곳이 가장 가까운 형제 나라라니, 그야말로 지독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문득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런 말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삶은 언제나 살 가치가 있다. 터무니없을지라도 축제에 초대받은 듯 살아라.”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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