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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젠더살롱] 가망 없는 세계에 맞선 밀양 할매들의 초고압 희망 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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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끝내 지지 않는 싸움이 만들어낸 희망의 전류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중
한국일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10년을 맞아 열린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참가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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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행정대집행 1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밀양 가는 희망버스 안. 밀양에 가까이 들어서자 비가 쏟아졌다. 비옷과 모자를 쓰고 버스에서 내렸다. 초여름에 들어선 밀양에는 밤꽃 냄새, 끝까지 익은 앵두와 보리수, 모내기를 막 끝낸 벼들, 새잎을 내어놓은 감나무들이 줄 지어서 여느 시골 마을 풍경을 짓고 있었다. 빗속을 15분쯤 걸어 마을로 들어서자 풍경이 급변했다. 아파트 40층 높이의 765킬로볼트(kV) 송전탑은 1층 높이의 시골 마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혀 한없이 올려다보아야 하는, 초고압적 자세로 서 있는 그것을 두고 121번 송전탑이라고 했다.

초고압적 풍경


그것은 울산 울주군 신고리 핵발전소 단지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송하기 위해 부산 기장, 양산, 밀양, 창녕을 가로질러 북경남 변전소까지 도착하는 90.5km 거리에 세워진 161기의 초고압 송전탑 중 하나였다. 내 위로 솟은 121번 송전탑은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어린 벼들이 자리 잡은 논 한가운데에,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핵발전소와 한 몸인 초고압 송전탑은 가정집에서 쓰는 220볼트(V)보다 약 3,400배에 달하는 76만5,000볼트의 전기를 태워 보내는 고속도로인데, 웅웅웅 송전 소음을 내며 전력을 다해 흘러가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초고압 송전탑은 현실의 감각을 초과하고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2013년 5월 처음 밀양 갔던 날, 그날도 그랬다.

나는 7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밀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한국 생활에 막 적응해 나가고 있을 무렵. 한 동료가 느닷없이 밀양에 같이 가자 했다. 밀양 하면 사과? 정도 떠올랐을 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룰루랄라 밀양에 도착했을 때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자 이 작은 시골 마을에 경찰이, 그것도 무장한 경찰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하늘엔 헬기가 쉴 새 없이 공사 자재를 산으로 나르고, 산 아래엔 구급차들, 핏대를 세우고 삿대질하고 있는 한국전력 직원들, 멍투성이로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할머니, 경찰과 대치 중인 주민들과 연대자들의 아우성, 전쟁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무를 꼭 껴안고서

한국일보

2013년 10월 경남 밀양시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주민과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잘려나간 나무를 꼭 껴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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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초고압 송전선로가 마을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송전탑 반대 투쟁은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초고압 송전선로가 전자기장을 발생시켜 발암을 일으키는 등 인체에 위해를 가할 뿐 아니라, 토지 등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송전탑 건설에 반대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송전탑 노선을 바꾸거나, 지하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전력에서는 ‘사업성’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2008년 송전탑 시공사가 확정되고 '사업성'을 따질 측량이 시작되었다. 송전탑 전면 백지화를 위한 총궐기대회와 규탄대회 등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2010년 12월 동시다발로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벌목이 시작되었다. 밀양 할매들은 공사를 막기 위해 겨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할매들마다 그 나무 그거 못 베라고 저 나무를 하나씩 끌어안고예, 그래갖고 그래 싸움"을 시작했다. 농사짓고, 살림 살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병든 가족 식사를 챙겨 둔 후 밀양 할매들은 산에 올라 나무를 끌어안았다.

산에는 한국전력이 고용한 용역 인부들이 나무를 끌어안은 밀양 할매들 "목을 함부로 비트는 것도 예사"고, "손목도 막 비틀고", "발로 팔을 밟고", "할매들을 깔고 앉아 깔아뭉"갰다. 무법천지였다. 밀양 할매들은 끈질기게 산에 올라 이 나무를 안고 있다 끌려 내려갔고, 저 나무를 안고 있다 끌려 내려갔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너덜너덜해지면 바닥을 기어서 나무를 안으러 갔다. 그러다 공권력의 진압이 시작되면서, 쉽게 끌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 송전탑이 설 자리에 구덩이를 팠다. 그곳을 자신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할매들의 무덤


초기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선 건 지역의 권위 있는 '남성'들이었다. 농촌 지역의 거주자 대부분은 70대 이상 고령의 '여성'이었지만, '남성'들은 이장, 노인회장, 동장, 면장, 영농 후계자 등등 시골 공동체 내 정치와 관습을 좌우하며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도맡았다. 하지만 한국전력의 합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초기에 반대운동을 이끌었던 대부분의 '남성'들은 하나, 둘 싸움의 현장을 떠나거나, 송전탑 찬성으로 우르르 돌아섰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까지 그 어떤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싸움의 현장에 남은 다수의 사람은 '여성'이었다. 맞다. 우리가 아는 밀양 할매들이다.

무덤 같은 구덩이에 누워 "개 목걸이 안 있어요. 그거를 허리에 감고 목에 감고 쇠말뚝에 매고… 그래 감아가 매고" 버텼다. 끌려 나가며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투성이가 되어서도 또 땅굴로 들어가 "열 명의 할매가 목과 목 사이사이에 쇠사슬을 걸어가지고 그래 앉"았다. 밀양 할매들은 최소한의 생존권과 땅을 한평생 일구며 살아온 자의 자긍심, 지구 거주자들의 존엄과 후손들의 삶을 포함한 뭇 생명들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끊어진 쇠사슬을 주워 담으며

한국일보

2014년 6월 11일 오전 경남 밀양시 부북면 장동마을 입구 움막에서 765㎸ 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던 주민이 경찰 진입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밀양시는 이날 오전 6시 행정대집행 영장을 주민과 반대대책위원회에 전달하고 농성장을 강제 철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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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1일 새벽 6시 10분쯤. 송전탑 공사 강행을 위해 최종적 폭력이 집행되었다. 밀양 행정대집행에 동원된 2,000명의 경찰과 200여 명의 한국전력 직원과 공무원들은 군사작전을 펼치듯 밀양 할매들과 연대자들을 싹 끌어내렸다.

칼을 들고 농성장을 난도질했다. 경찰과 한전은 이겼다는 걸 과시하며 선언하듯 엔진 톱으로 나무를 굳이, 베어냈다. 나무를 베는 소리 사이로 울음바다가 첨벙거렸고, 실신한 사람들이 실려 내려가고, 팔이 부러진 수녀님이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진압경찰들은 단체로 손가락 브이 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현실을 초과하는 그 폐허에서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밀양 할매'가 잘려 나간 쇠사슬을 줍는 소리였다. 다음에 또 써야 한다며 잘게 부서진 쇠사슬"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실망할 끼 아이고, 절망 속에 빠지야 되는 게 아이"라고. 끊어진 쇠사슬을 "내려가서, 이거 다시 써야 된다고" 우리의 밀양 할매들은 주워 담았다.

희망이라는 재생에너지


2014년 12월 28일, 완공된 송전탑을 타고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윤석열 정부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을 발표하며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과 신규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핵 폭주’를 예고했다. 그러나, 우리가 추앙하는 밀양 할매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아서, 결국 지지 않는 싸움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송전탑을 뽑아내자”라는 구호를 두른 싸움. 소나무, 나비, 꽃, 산짐승들에게 산천을 돌려주기 위한 싸움. 보상금 몇 푼이 아니라 땅에 뿌리 내린 자의 긍지가 걸린 싸움. "부서진 채로라도" 함께 삶을 돌보는 싸움을 통해, 초고압 희망 전류를 송전하고 있다. 밀양 할매들의 싸움으로 빚어낸 희망은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라는 냉소에 끌려다니지 않게 하고, '다 끝났어. 나 이제 안 해. 지쳤어'라는 낙담으로 끌려 내려오지 않게 한다. 도무지 가망 없는 세계에 맞설 희망을 움직이게 하는 재생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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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상동면에 세워진 송전탑.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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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이는 희미한 희망 사이로


밀양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희망버스 안. 온통 젖은 비옷과 모자를 접어 가방 안에 넣고 새 양말로 갈아 신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밀양을 조금씩 벗어나면서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고속도로에 줄 지어 선 가로등 뒤편으로 송전탑에 매달린 항공 장애 표시등이 깜박깜박했다. 내가 쓰던 전기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깜박했다. 우리가 쓰는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깜박했다. 희미하기만 하던 희망에 전기가 통하기 시작한 듯 깜박깜박했다.

밀양 송전탑 운동의 과거-현재-미래를 담은 책 '전기, 밀양-서울'(김영희, 교육공동체벗, 2024) 속에 밀양 할매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책 안에 우리가 발견하고, 발명해야 할 미래와 희망이 찌릿찌릿 깃들어있다. 일독을 권한다.
“바람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중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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