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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그 영화 어때] 20년 전 이혼 부부가 함께 연주하는 미식의 교향곡 ‘프렌치 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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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74번째 레터영화 ‘프렌치 수프’입니다. 작년 칸 영화제 감독상(트란 안 훙) 수상작이죠. 올해 프랑스가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 자국 출품작으로 선택한 영화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는 ‘콘크리아 유토피아’ 였습니다) 프랑스가 ‘추락의 해부’가 아니라 이 영화를 선택해서 말이 좀 있었어요. ‘아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가 아니라 음식 영화를?’ 이런 반응이었죠. 이전에 ‘그 영화 어때’ 레터에서도 말씀드렸듯, 전 ‘추락의 해부’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려니했는데, 시사회 때 이 영화를 보고 수긍이 갔어요. 작품성이야 의견차라 치고, 영화 색깔이 정말 프랑스적이거든요. ‘이건 프랑스에서만 만들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니까요. 어떻기에 그런지 아래에서 설명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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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렌치 수프'에서 '주방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사랑하는 여인 외제니(줄리엣 비노쉬)를 위해 요리를 만들어냅니다. 로댕이 조각상을 빚어낼 때의 집중력이 이 정도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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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수프'의 원제는 ‘The Taste of Things’ 입니다. ‘더 테이스트 오브 띵즈'라고 제목을 달지 않은 수입사에 감사. 온갖 사물의 오묘한 맛, 인생의 사계절을 지나며 누리는 미감을 담은 영화니까 원제는 원제대로 잘 단 제목이죠. 사실 꼭 수프 얘기는 아니에요. 그래도 영화의 개성을 살리려고 수입사에서 고민을 많이 했구나 느꼈습니다.(영혼 없는 한글 발음 제목은 정말 무성의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제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건 요리 자문을 맡았다는 피에르 가니에르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음식 담당을 했거든요. 처음 맡았을 땐 ‘난 누구, 여긴 어디' 심정이었습니다. 아마 저희 신문사에서 가장 맛집에 관심 없는 사람 순서를 매긴다면 제가 몇 등 안에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맛집 앞에 줄서서 기다리는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랑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지금도 생각) 어디 가면 뭐가 맛있다는 기사를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어요. 그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느냐. 역시 언제나 정답은 사람이죠. 요리사들 찾아다니면서 만나서 얘기 듣고 배우면서 즐겁게 기사 썼습니다. 와, 멋진 요리사들이 세상엔 또 얼마나 많은지.

그 시절 제가 만났던, 진심으로 감탄하게 했던 요리사 중 한 분이 피에르 가니에르였습니다. 이 분은 요리사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고 예술가이자 철학자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음식 만드는 분이 아니고 철학을 조리해서 그릇에 담아내 보이는 분이시거든요. 2015년에 제가 인터뷰한 기사는 링크로 레터 제일 아래에 붙일게요. 우선 그때 지면에 실렸던 피에르 가니에르의 포스를 아래 사진으로 살짝 느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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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만난 피에르 가니에르는“요리는 영원한 탐구”라며“단 한 번도 내 요리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요리를 먹고 난 손님들의 가슴에 남는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했다.


‘요리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피에르 가니에르는 ‘프렌치 수프’ 요리 자문도 하고 영화에 잠깐 출연도 하는데요, 유라시아 왕자의 전속 요리사로 나와서 길고 긴 디너 메뉴를 낭독합니다. 이 메뉴만 들어도 ‘프렌치 수프’가 어떤 영화인지 아실 수 있겠다 싶어서 영화 보며 열심히 수첩에 적어봤습니다. 몇 가지를 보자면,

-비둘기 비스크

-새끼 멧돼지 고기

-파테 로얄과 여름 송로를 곁들인 뀡 테린느

-햄 에센스를 곁들인 허브 자고새 꼬치구이

-멧비둘기 푸페탱과 속 채운 곤들매기

-크림 채운 영계 두 마리와 생가라즈식 어린 토끼

-제네바 호수의 베스타식 아귀

-샤르트뢰즈에 담근 급류 송어

등등입니다. 이것도 전부가 아니라 극히 일부입니다. 유라시아 왕자가 초대한 3코스 디너 메뉴고요, 영화에서 “8시간 동안 먹었다”고 나온답니다. 식사 한 번에 8시간 걸리는 메뉴. 그런 음식을 만들고 음미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가 ‘프렌치 수프'입니다. 엄마표 집밥 요리하곤 거리가 멀고요. 미식의 절정을 추구하고 음식으로 인생과 예술을 소통하고, 사랑과 이별도 음식을 통해 완성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다 먹고 나서 “으왕, 오늘 저녁 맛났어~”가 아니라 “오늘 식사의 요체는 빛과 투명함이었소”라고 말하는 그런 분위기. 짐작가시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저처럼 음식에 관심 없는 사람도 홀린 듯이 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영화 시작하고 15분 정도 주인공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와 도댕(브누아 마지멜)이 조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저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어서 봤답니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듯 가자미를 뒤집어 뼈를 발라내는 손길을 바라보다 보면 음식 역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세상에 남지 않고 그때그때 음미되어 사라진다는 점만 다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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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렌치 수프'의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지멜. 실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헤어진 지 20년 만에 이 영화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배우의 삶이란. 왼쪽은 두 사람이 만났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키스'(1999)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인생의 가을에 결혼하자'고 약속한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극장에서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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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 도댕은 ‘주방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요리사입니다. “새로운 요리의 발명은 별의 발견보다 행복에 기여한다”고 말할 정도로 미식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외제니는 그와 20년째 함께 일하는 파트너인데요, 둘이 음식을 만들고 먹고 대접하는 모습이 영화의 절반쯤이고, “인생의 가을에 결혼하자”는 약속을 이뤄가는 모습이 절반쯤 됩니다.

남자 주인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세요? 이자벨 위페르와 ‘피아니스트’(2001)에 나와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받았던 브누와 마지멜입니다. 다들 저 유명한 화장실 키스신 포스터를 기억하실 듯. ‘피아니스트'로 상 받을 땐 20대 꽃미남이었는데 어느새 중년이 되었군요.

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와 마지멜 두 주연 배우가 한때 결혼했던 사이라는 사실도 아시고 보시면 새롭게 다가오는 장면이 많으실 거에요. 1999년에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키스'로 만나서 결혼했다가(줄리엣 비노쉬가 10살 연상) 2003년에 딸 하나를 얻고 이혼했는데 이번에 20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난 거죠. 실제 인생이 반영돼서 그런지 ‘프렌치 수프'에서 둘의 연기가 절절하답니다. 진정으로 ‘인생의 가을'이 담겨있다고나 할까요. 특히 도댕이 외제니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장면은 연인을 위해 혼신의 작품을 빚어내는 예술가의 숭고한 집중력이 고스란히 느껴질 듯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죠.

음식이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이자 예술일 때 어떤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께 ‘프렌치 수프'를 권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어보기 힘든 요리가 나오긴 하지만, 눈으로 맛보는 순간만으로도 만족하실 수 있을 거에요. 저는 피에르 가니에르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좋았네요. 제 과거 인터뷰 기사를 볼 때 “이런 멍청한 질문은 왜 한 거지?” “이렇게밖에 못 물어봤다니”라며 부끄러울 때가 대부분인데, 지금 찾아보니 피에르 가니에르 인터뷰는 실로 드물게 괜찮은 문답이 꽤 있네요. 흠흠. 피에르 가니에르가 그만큼 대단한 분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문답들.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한숨을 쉬며 “불행하게도 그렇다, 불행하게도”라고 했다.

―예술가인 것이 왜 불행한가?

”예술가는 절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평생 피곤하다. 불행한 거지.”

―자신이 만든 음식에 만족한 적이 없나?

”한 번도 없다. 요리는 결과물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는 기쁨 때문에 하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남기고 작가는 책을 남긴다. 음식은 남는 게 없다. 허무하지 않은가.

”어젯밤에 고객들에게 문자를 받았다. 런던의 한 고객은 ‘잘 먹었어요, 멋진 밤이었습니다’라고 보냈고 ‘매우 즐거웠다’는 문자도 왔다. 요리는 사라져도 추억이 남지 않는가. 순간의 감정이 빚어낸 둘도 없는 작품이다.”

저만 피에르 가니에르 답에 감탄하는 건 아니죠? 정말 답변마다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2015년 저의 인터뷰 기사는 아래 붙일게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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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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