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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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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전쟁 사이 예술 황금기, ‘광란의 사랑’ 불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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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여성 편력 보유한 브레히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막장드라마 방불케하는 실제 연애… 1929년부터 10년간 이야기 다뤄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플로리안 일리스 지음·한경희 옮김/584쪽·2만7000원·문학동네

동아일보

1955년 중국 톈안먼 광장을 방문한 장 폴 사르트르(오른쪽)와 시몬 드 보부아르. 둘은 1929년부터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의 계약 결혼을 약 50년간 유지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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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29년 4월 10일 헬레네 바이겔과 결혼했다. 결혼 전 둘 사이에는 이미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샤를로텐부르크의 호적 사무소에서 혼인 서약에 ‘네’라고 대답한 직후 한 일은 다른 연인 카롤라 네어를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브레히트는 그녀에게 결혼식 때 썼던 시든 수선화 꽃다발을 건넨 뒤 “30분 전 바이겔과 결혼했으며, 그것은 불가피하고 무의미한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네어는 꽃다발을 내동댕이치고 가버렸다. 다보스에서 죽어가는 남편인 작가 클라분트를 돌보다 베를린까지 달려왔는데, 애인의 결혼 사실을 알고 분노에 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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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망명지마다 애인을 둘 만큼 여성 편력을 지녔다. 그의 애인들은 브레히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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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은 제목대로 ‘광기’ 넘치는 사랑 이야기다. 독일 언론인이자 작가인 저자는 ‘베를린 황금기’의 끝자락인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까지 격동의 10년을 문화계 거장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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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세계의 역사는 적어도 그 절반은 사랑의 역사”라는 말처럼, 개인사인 사랑 이야기들 속에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읽어낸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 예술가들의 모더니즘을 그려낸 전작 ‘1913년 세기의 여름’의 등장인물이 300명이 넘는데, 신간에선 두 배인 600여 명을 다룬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394권의 저서를 읽고 일기, 편지, 잡지, 신문 등 다방면의 자료를 조사했다.

신간은 리얼리즘 소설 같은 문체로 독자가 주인공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처음 식사 자리에 초대했을 때 그녀를 부른 애칭은 프랑스어로 비버를 뜻하는 ‘카스토르’였다. 둘은 상대방의 연애를 간섭하지 않겠다는 계약 결혼을 했지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끝없는 바람기에 남몰래 괴로워한다.

동성애, 근친애, 이기적 사랑, 불같은 사랑…. 지고지순함과는 거리가 먼 ‘막장 드라마’ 같지만 열정 넘치는 이들의 사랑은 짜릿하고 자극적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실화라는 점에서 읽을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다.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가 동성 연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알코올 의존증 상태가 됐다. 파블로 피카소는 젊은 연인 마리테레즈에게 빠진 후에 아내 올가를 그릴 때 더없이 냉담해졌다. 올가는 이를 두고 “피카소의 그림 속에는 여인이 아니라 괴물이 있었다”고 말했다.

복잡한 치정 이야기 속에서 간혹 눈에 띄는 낭만적인 대목이 눈길을 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름날 호숫가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전보를 친다. “글로 쓰는 것은 바보 같아, 일요일에 당신에게 키스하러 갈게.” 저자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빌려 표현한 ‘일요일은 키스와 시간의 제곱’이라는 문구가 재치 있게 들린다.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대공황과 파시즘의 부상까지, 불안과 증오가 범람하던 시대, 사람들은 그저 현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그들의 사랑이 쉽사리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뜨거운 열정이 전간기(1918∼1939년·1, 2차 세계대전 사이) 예술의 황금시대를 낳은 원동력이 된 게 아닐까.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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