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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World & Now] 일본 환대 문화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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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오.모.테.나.시'.

일본 특유의 손님을 환대하는 대접 문화를 말하는 단어다. 일본을 찾는 많은 외국인이 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오모테나시다. 호텔이나 식당에서 생각 이상의 서비스를 받는 것, 돈이 든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려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는 것 등은 오모테나시 덕분에 가능하다.

이러한 오모테나시가 최근 일본에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후지산 사진 명소로 꼽히는 곳에 이를 못 보도록 대형 가림막을 설치하거나, 관광객에게만 돈을 더 받는 이중 가격제 도입 등이 과연 오모테나시에 걸맞냐는 것이다. 물론 후지산 명소의 경우 차선을 넘나들며 사진을 찍는 일부 관광객의 무질서가 주요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대형 가림막 같은 극단적인 수단은 전혀 일본답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러한 오모테나시 실종 배경으로 팍팍해진 삶을 들고 있다. 넉넉했던 곳간은 비어가는데 채워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자 선진국의 여유가 사라지고, 남에 대한 배려 또한 줄어든다는 해석이다.

곳간을 비우는 대표 주범으로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꼽힌다. 최근 2~3년 새 일본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2~3% 상승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으로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던 일본은 경제 회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에 주목해왔다.

나라 경제는 물가가 오르며 정상 궤도를 찾는 듯 보이지만 국민이 느끼는 물가 부담은 어마어마하다. 30년 가까이 한 끼에 500엔이던 직장인 점심 도시락은 최근 2~3년 새 800~1000엔을 주고도 괜찮은 것을 고르기 힘들 정도로 올랐다.

특히 엔저는 여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수입 제품 가격이 뛰면서 일본 슈퍼에서 오렌지주스는 자취를 감췄고, 아이들이 먹는 급식에서는 영양가 높은 고기 반찬이 사라졌다. 엔저로 수입 쇠고기 가격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은 결과다.

물가는 소비자가 지갑도 닫게 만들었다. 기업이 급여를 올렸지만 물가가 더 뛰면서 25개월 연속 실질임금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올해 1분기 개인 소비는 0.7% 감소하며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장 감소세다. 지난해 한국을 앞섰던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1분기에 -0.5%로 반전된 것에는 소비 감소의 영향이 크다.

물가는 정부 지지율에도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최근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물가는 이미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총선에서 '대파'로 상징되는 물가 급등이 중산층의 분노를 일으켜 결과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먹거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럽다.

[이승훈 도쿄 특파원 thoth@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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