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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취재파일-무적자①] 기록없는 자들을 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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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경계인 무적자, 356명 추적기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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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경계인, 무적자



저희 SBS가 지난 14일부터 보도한 6편의 기사들은 '무적자(無籍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적(籍)'이 없는 사람들. 시민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성과 본이 없는 사람들. 주민등록증과 주민번호, 가족관계등록부조차 없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무적자가 적지 않고 쪽방촌과 노숙인 시설을 채우고 있습니다. 남대문, 중림동, 영등포를 드나들며 무적자를 취재하다 한 관계자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호 물품을 나눠준다고 현수막을 크게 붙이잖아요? 그 현수막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민번호가 없으니 학교에 가본 적이 없고 한글도 모릅니다. 현수막 내용을 읽을 수 없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모여들고 "뭐야, 이번엔 옷 한 벌 밖에 안주네!"라는 식의 논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귀동냥으로 숨어 듣고 나서야 비로소 옷을 받으러 간다는 무적자들.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어 내야 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로부터 소외됩니다. 병원도 못 가고, 전화 개통도 못하고, 투표를 해본 적도 없고, 계좌를 만들 수 없으니 현금만 들고 다니다 잃어버립니다. 그런 무적자를 위해 뒤늦게라도 성과 본을 만들어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는 '창성창본'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무적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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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노숙인 등의 복지사업안내>라는 복지부 지침에는 '주민등록미식별 대상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민등록번호 확인이 불가능한 주민등록미식별 대상자, 즉 무적자를 발견했을 때 일단 사회복지 전산관리번호를 임시 지급해 지원하라는 내용입니다. 급한 불부터 끄자는 취지로 주민번호 대용으로 임시 번호를 발급하는 거지요.

사회복지 전산관리번호는 무적자의 규모를 추정할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전산관리번호는 모두 2만 5천42건 발급됐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출생 미신고아동, 북한이탈주민, 중복 발급 건수도 포함돼 "무적자가 2만 5천 명이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단서는 법률구조공단의 가족관계미등록자 지원 현황입니다. 법률구조공단은 지난 2010년부터 2023년까지 총 1천654건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과 창성창본 업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외국인과 내국인을 분류한 수치가 아니어서 이 역시도 정확한 집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민등록 업무를 관장하는 행안부, 법률 구조업무를 담당하는 법무부, 사각지대를 찾아내야 하는 복지부 누구도 무적자의 집계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 얼마나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부 뜻 있는 변호사, 사회복지사, 공무원, 구호시설 관계자들이 창성창본을 해주고 지원 방법을 찾으며 힘 닿는 대로 돕고 있던 겁니다.

9개월 간의 조사…356명의 이야기



SBS는 서울시와 함께 서울시 산하 노숙인 보호시설 9곳을 통해 창성창본에 성공한 무적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조사했습니다. 총 몇 명의 무적자가 어느 시설을 얼마나 거쳐갔으며, 각자 어떤 사연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창성창본까지 성공시켰는지 자료를 모았습니다.

9개월이 걸렸습니다. 시설들의 도움을 받아 창성창본에 성공한 무적자 188명을 찾았습니다. 취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68명을 더 찾아 356명을 특정했습니다.

교도소를 네 번이나 다녀오는 동안 경찰, 검찰, 법원, 교도소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던 무적자, 어린 시절 보육 시설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 탈출한 후 식당 종업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무적자, 민증이 없어도 일자리를 주는 곳을 찾아 농가와 도자기공방을 거쳐 염전까지 팔려갔던 무적자. 그리고 일자리를 얻고 돈을 저축하며 서서히 사회의 일원으로 정착해왔던 유일한 성공사례. 저마다의 작은 사연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의미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왜 무적자에 주목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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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를 준비하면서 "왜 우리가 무적자에 주목해야 하는가"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고민하던 답을 남깁니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는 정의로운 사회의 출발점을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찾습니다. 무지의 베일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 신분, 위치에 놓일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강자가 될지 약자가 될지 알 수 없으니, 강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 만에 하나 약자(최소수혜자)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게 롤즈의 주장입니다.

"내가 약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마련하자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강자가 되면 속 편하겠지만, 설령 약자가 되더라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구제 수단을 마련해두자고 약속합니다. 롤즈의 주장은 단순히 '딱하니까 도와야 한다'는 식의 시혜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 국가가 복지 제도를 정교하게 구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철학적 기반이 됐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익숙한 논의입니다. 문제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눈치채지 못했던 약자가 계속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정도면 충분히 발전된 사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예상치 못했던 사각지대가 계속 발견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저 약자였을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며 사각지대를 매울 방법을 찾아간다면 우린 조금 더 온전한 사회로 진보할 수 있습니다.

무적자는 그 약자 중에서도 최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회적 약자라고 하더라도 시스템 일부에 편입돼 있는 경우가 보통이고, 우린 그 시스템을 전제해 도울 방법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무적자는 집계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예 배제된 존재들입니다.

롤즈의 주장처럼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내가 무적자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생각을 우린 해볼 수 있을까요. 그런 무적자조차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합의할 수 있을까요. 이런 분들에게조차 공감하고 이웃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린 사회 시스템을 또 한 번 고도화하고 또 하나의 사각지대를 채울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놓였을 수 있다는 역지사지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기사를 준비했던 이유입니다.

거리의 낭인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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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볼 무적자 분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창성창본 이후 자립에 성공한 사례가 없지 않습니다. 저희가 만났던 356명 무적자 중 유일하게 자립에 성공한 분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노숙 생활을 하며 거리의 낭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창성창본과 가족관계등록을 진행함과 동시에 각종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모두 끊고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호전됐습니다. 기초생활 수급 등 기본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고,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노동하고 돈을 번다'는 의식을 배웠습니다. 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되자 적은 금액이지만 조금씩 돈을 모아 1천3백만 원을 저축했습니다. 공공일자리 사업이 끝난 이후엔 정상적인 구직 절차를 거쳐 건물 미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재산을 더욱 불려 인근 원룸으로 입주하며 시설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창성창본에 성공한다면 이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음에도 무적자분들이 창성창본을 귀찮아하거나 꺼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도권 안의 삶이 어떠할지 가늠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제도권 안에서 혜택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제3자가 볼 때는 "저렇게 불편한데 어떻게 살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야인으로 살아온 그들은 애당초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민등록을 해야 합니다"라는 논리적인 설득은 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시라 용기를 내달라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다른 무적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창성창본에 성공한 무적자 강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세상이니까 한 살이라도 겁먹지 말고 숨어 있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런 분들의 사례를 기사로 남겨둔다면, 혹시 어떤 무적자분이 우리의 기사를 본다면, "나도 해볼까"라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기록 없는 자들을 위한 기록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러니. 시민권 행사는 커녕 평생 법과 제도의 보호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누구나 갖는 공적인 기록, 개인의 역사가 국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 시간이 부족해 방송 기사에 미처 다 담지 못했던 기록 없는 자들을 위한 기록, 6명의 기자들이 취재파일로도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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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 기자 mzmz@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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