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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일제의 국가 폭력, 일본인도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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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중일전쟁과 '개척민' 그리고 만몽개척단(滿蒙開拓團)

1937년 7월 7일 북경 근교에 자리 잡은 루거우치아오(蘆溝橋)를 습격하면서 촉발된 중일전쟁은 만주국의 몰락, 나아가 일본제국의 몰락을 야기하는 원인이 됐다. 일제는 전선의 확장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대규모 한인들을 집단적으로 만주지역에 이주했다. 강제이주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이다.

만주국의 북변진흥 정책 일환으로 더욱 강도 높게 추진된 집단부락 설치는 교통이 발달한 지역을 우선으로 진행됐다. 1936년까지 만주지역 특히 간도지역 집단부락의 추진 주체는 조선총독부였으며, 1937년 이후에는 만선척식주식회사의 주도로 진행됐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아권업공사가 합동으로 사업을 전개한 반면, 1937년 만척이 본격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면서, 그 범위도 간도지역을 벗어나 전 만주로 확대됐다.

따라서 조선총독부가 집단부락을 설치할 때는 주로 간도지역이 그 대상이었지만, 만척의 경우 전 만주이고 또 그 강제성의 강도도 훨씬 더 심했다. 밀산 화평집단부락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된다.

밀산지역은 러시아와 접경지역으로 1910년 전후 일찍이 독립군이 농장을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목단강을 경유해서 목릉의 팔면통을 거쳐 점차적으로 집단부락이 설치됐던 곳이다. 그 대상은 경상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내몽골의 한인 이주는 동북지역 보다 늦게 진행됐다. 1920년 포두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된 한인촌은 자발적인 이주의 결과물이었다. 1937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내몽골지역으로의 한인의 강제 이주는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중일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일제는 북만주와 내몽골 개척에 전력했으며, 만선척식회사는 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현재 내몽골 흥안맹 선광촌의 경우 500여 호가 1945년 초 개척단으로 정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들은 당시 만선척식회사가 설립한 농장에 강제 수용되어 생활했으며, 이곳은 기 정착민인 한족들의 거주지였으나 일제가 강제로 경작지를 몰수하여 분배했다. 따라서 내몽골에서 한인 이주와 정착은 또 다른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일제로서는 한인을 갈등의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개척의 선봉이라는 측면 역시 강조했다. 내몽골지역에서 한인의 강제이주가 개척단과 만몽청년의용군(滿蒙靑年義勇軍)으로 대별되듯이, 약탈과 수탈의 첨병으로 인식된 또 다른 한인의 모습이 역사의 잔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내몽골 자라특기 선광촌 800여 명의 인구 가운데 약 80%가 '조선족'일 정도로 집단부락의 현재성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집단부락'의 창설을 문화창달의 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던 만주국은 구성원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시체제 만주국의 농업을 이끌어 갔다. 특히 만주국은 이주 한인들을 "만주에서의 자원 및 산업 개발의 선구"라고 한껏 추켜올렸지만 정작 그 주체인 한인들에게는 왕도낙토가 아닌 강제성이 담보된 또 다른 낮선 고향일 뿐이었다.

한편, 일본 농업이민은 만주국에서는 성립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오족협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만주의 광활한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일본 농민 이주는 제국주의 일본 차원에서 이루어져 할 사안이었다. 따라서 일본 이민 정책은 왕도낙토, 오족협화와 분리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정책이었다. 1945년 8월 제국 일본이 패망할 때 만주에는 잔류 일본인이 200만 명을 상회했다.

기민(棄民), 일본이 버린 자국민: 중국 잔류 일본인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은 패망했다. 당시 해외에는 일본인 군인, 군속, 일반인을 합해 약 660만명 정도 존재했다. 포츠담 선언 제9항에 "일본군 군대는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후 각자의 가정으로 복귀하여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할 기회를 얻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일본 일반 국민에 대한 언급이 없어 300만 명 넘는 재외 일본인들은 '각자 도생'의 형식으로 귀환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련의 참전과 동시에 만주 현지 농민들과의 마찰로 인해 만몽개척단들의 생활실태는 패전국의 국민들로서 자결에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찌 보면 제국 일본 위정자들의 대외침략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전락한 것이 만몽개척단원들이었다.

이들의 귀환은 쉽지 않았다. 고아와 여성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금전을 받고 중국인에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인의 국내 귀환도 전환점을 맞이했다. 미국 주도의 귀환 정책이 멈추어졌다.

귀환자 수용을 담당했던 후생성 역시 100만 명의 일본인 귀환에 직면하여 행방불명자에 대한 면밀한 청취 조사를 게을리 했는데, 이 점도 잔류 여성과 잔류 고아의 귀국이 지체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반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부도 냉전의 구도 속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반성하는 기미는커녕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 잔류 일본인, 아니 중국에 버려진 일본인들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상대방을 가격하는 행위는 언제나 존재했다. 냉전 시대 일본은 '반공'을 무기로 더욱 중국을 공격했다. 1958년 자민당 정부는 287석을 얻어 166석을 얻은 사회당을 압도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중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중국 잔류 일본인들을 고향 방문 명목으로 귀환시켰다. 이들을 통해 중국에는 6000명 이상의 잔류여성과 고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은 외면했다.

1972년 중국과 일본이 수교를 단행하면서 중국 잔류 일본인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종식될 즈음 잔류 일본인 문제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여 1981년부터 일본 고아들을 귀국시키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도 '방일조사'를 실시했지만 27년간 체계적인 계획없이 진행했다. 이러한 가운데 2006년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만주지역으로의 일본 이민 송출의 현재성을 근거로 '중국 재류 일본 고아'들이 일본공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고베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제국주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끊임없는 대륙침략 정책을 단행했다. 그 가운데 동북아 최초의 대규모 제노사이드였던 동학농민혁명이 있었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대한제국 강제침탈,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제국 일본으로 동북아는 전쟁에서 자유로울 때가 없었다.

일본인들 역시 최고지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위정자들의 그릇된 외교 정책으로 항상 전쟁 속에서 생활했다. 이것도 국가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위정자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그 구성원과 주변국가까지도 위험에 노출된다면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범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과 연대가 필요하다. 역사의 준엄함이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력으로 사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프레시안

▲ 일본 해상자위대 군기로 사용되고 있는 자위함기. 욱일기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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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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