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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우울증 진단 안 받았지만…대법, 자살자 사망보험금 첫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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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일러스트=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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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우울증을 진단받은 적이 없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더라도 사후(死後) 심리 부검 등을 통해 사망보험금을 받을 길이 열렸다. 지금까지는 우울증 등 정신과 진료기록이 있어야만 자살자에 대한 사망보험금이 인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는 지난달 9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근로자 A씨의 극단적 선택 이후 남편 B씨가 보험사들을 상대로 낸 보험금 소송에서, “보험금 청구는 인정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고 4일 밝혔다.

A씨는 평소 건강했고, 우울증 등 정신질환 관련 진료를 받은 적이 없던 사람이다. 문제는 A씨가 겪게 된 과중한 업무부담이었다. 2017년 7월 KAI의 방산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A씨의 업무량은 폭증했다. 사망 직전 1주일간 연장 근무시간은 44시간에 이르렀고 6개월간 연장 근무시간은 533시간에 달했다. 이 기간 A씨는 자신의 고유한 업무 분야가 아닌 전산시스템 개발 업무도 병행했는데, 시스템 오픈이 지연되며 문책받는 일도 적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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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원가 부풀리기와 하성용 전 대표의 횡령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2017년 7월 18일 오후 경기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KAI 협력업체 T사를 압수수색, 압수품을 가져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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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A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를 돌보기 위해 2018년 1월 육아 휴직을 예정했다. 그러나 업무부담으로 이를 같은 해 3월로 연기한 뒤 또다시 전산시스템 오픈일인 4월 이후로 연기하는 상황이 연거푸 발생하자 A씨는 사망 전날 회사에 제출했던 육아 휴직계를 스스로 회수했다. A씨는 남편이나 동료를 붙잡고 “업무로 인해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머릿속에서 일이 떠나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나고 죽고 싶다” 등을 호소하곤 했다.

A씨는 가족과 업무 사이에서 깊게 고통받았다. 2018년 2월 야근을 마치고 귀가한 자정 무렵 퇴근한 복장 그대로 유서 한 장 없이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2018년 11월 “A씨는 업무상 사유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게 됐다”며 A씨 죽음이 산업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도 심리학적 의견서를 통해 “A씨가 높은 직무 스트레스와 양육 스트레스가 혼재되어 주요 우울장애가 유발된 것으로 추정되고, 주요 우울장애 증상들이 자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을 밝혔다.

남편 B씨는 이 자료들을 토대로 사망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들이 거부하자 소송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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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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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은 A씨가 생전 정신과 진료 기록이 없음에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보험약관에 따르면 자살은 보험 가입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라서 모든 보험계약에서 ‘보상하지 않는 손해’로 기재돼 있다. 하지만 만약 보험 가입자가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쳐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엔 보험금 지급을 예외적으로 인정한다.

1심은 “A씨가 앞으로 회사에서 처리하여야 할 업무량 및 그로 인한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망 당시 순간적으로 정신적 공황 상태를 일으켜 사물을 분별하거나 의사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으로 보이고, 그 외에 다른 자살 원인을 찾아볼 수 없다”며 B씨 등 유족에게 보험금 1억5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2심은 “A씨가 평소에 정신질환 진단이나 진료를 받은 적이 없고 사망 직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의사의 진단서나 소견서 등이 없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A씨가 주요 우울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됐을 여지가 없지 않다”고 봤다. 이런 판단에는 ▶A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점 ▶정신보건 임상 심리사가 작성한 심리학적 의견서에도 주요 우울장애가 의심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던 점 등이 주된 근거로 작용했다.

또 ‘심리 부검’(자살에 이르게 된 심리적 요인 조사)을 진행하지 않은 원심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심은 생전에 정신질환 진단 또는 진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정 등만을 근거로 A씨가 자살에 이를 당시 정신질환이나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원심으로서는 A씨가 사망하기 전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객관적 자료, 유족 등 주변인의 진술 등을 비롯한 모든 사정을 토대로 A씨의 당시 정신적 심리상황 등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A씨의 주요 우울장애 발병 가능성 및 그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인지 여부 등을 심리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법원에선 생전 정신과 진료 기록이 없으면 자살에 대한 보험금 청구를 기각하는 일이 많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매우 의미가 큰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은 비록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더라도 심리적 부검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심리해 보험금 지급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일보 진전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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