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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박세리 맨발 투혼’ 26년만에…한국, 톱10 ‘0명’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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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US여자오픈은 한국 선수들이 강세를 보였던 대회다. 올해는 27년 만에 처음으로 톱10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합계 4언더파로 우승을 차지한 일본의 사소 유카.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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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소 유카가 3일(한국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인근 랭카스터 골프장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합계 4언더파 276타로 우승했다.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가 필리핀 출신인 사소는 2021년 필리핀 국적으로, 이번엔 일본 국적으로 우승했다.

톱 10에 든 한국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은 챔피언 사소와 2위 시부노 히나코(합계 1언더파)를 비롯해 5명이 10위권 이내에 입상했다. 이어 태국은 3명, 미국은 2명, 호주는 1명이 톱10에 들었다.

US여자오픈은 미국의 내셔널 타이틀 대회지만, 한국 프로골퍼에게도 상징적인 대회다. 1998년 경제위기 시절 박세리가 맨발의 투혼을 발휘한 끝에 우승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한국 선수들은 전통적으로 이 대회에 강했다.

박세리 이후 지난해까지 26차례 대회에서 김주연(2005년)·박인비(2008·13년)·지은희(2009년)·유소연(2011년)·최나연(2012년)·전인지(2015년)·박성현(2017년)·이정은(2019년)·김아림(2020년) 등 한국 선수가 10차례나 우승했다. US여자오픈 톱 10에 한국 선수가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건 1997년 이후 27년 만에 처음이다. 박세리 맨발 투혼 후 26년 만에 톱 10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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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는 1998년 US오픈에서 ‘맨발의 투혼’으로 우승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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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2023년까지 26개 대회에서 US여자오픈 톱 10에 든 한국 선수는 평균 3.3명이었다. 전성기를 달리던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2개 대회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4.8명이 톱10에 들었다. 2017년엔 8명이 톱 10에 입상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런데 7년 만에 US여자오픈 톱 10에 입상한 한국 선수가 0명으로 줄었다. 2022년과 23년에는 3명, 2021년에는 2명이었다.

일본 투어는 1980년대 엔화 강세를 발판으로 세계 최고 상금을 자랑하는 여성 골프투어로 성장했다. 선수들은 안락한 일본 투어에 안주했고, 일본 여자골프협회는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장려하지 않았다. 고립된 상태에서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 톱10에 5명이나 이름을 올리면서 부활을 알렸다.

일본은 축구·야구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 골프도 선진국형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넘어 세계 최고가 되려는 선수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LPGA에 진출한 프로골퍼 하타오카 나사가 대표적이다. 그의 이름 ‘나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처럼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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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여자오픈 최종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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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는 최근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장려하고 있다. JLPGA 소속 선수가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에 나가면 대상 포인트를 일본 일반 대회(3라운드 대회)의 4배를 준다. 이에 따라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크게 늘었다. 태국 여자골프의 성장세도 눈부시다. 에리야 쭈타누깐이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뒤 선수들 사이에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많은 상금(US여자오픈 우승 상금 33억원)도 선수들을 끌어당긴다.

쭈타누깐 자매, 패티 타바타나킷, 아티야 티띠꾼 등이 LPGA 투어의 주력 선수로 자리 잡았는데 이외에도 많은 ‘태국의 박세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 대회엔 지역 예선을 통해 참가한 태국의 무명 선수 2명이 우승 경쟁을 벌였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31세의 위차니 미차이와 태국 투어에서 성장한 22세의 아프리차야 유볼이다.

한국 여자골프는 쇠락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선수들이 해외 진출보다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안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KLPGA는 임원들의 자리싸움으로 시끄럽다. 투어가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듯하다. 실력보다는 외모가 뛰어난 선수들이 앞다퉈 광고 모델로 데뷔한다. 스타 선수의 팬클럽은 대회 때마다 치열한 세 대결도 불사한다. 정치권을 빼닮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상건 상명대 스포츠 ICT 융합학과 교수는 “맨발의 투혼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한국 여자골프는 일본과 태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형국이다. 한국 사회가 변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는 것과 묘하게 닮았다. 새로운 동력과 구조·문화를 모색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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