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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누가 서방 우방국에 칼을 겨눴는가”···기울어진 ICC 내 칸 검사장의 결단[시스루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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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 I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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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현지시간)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54)은 두 곳을 향해 칼을 겨눴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지도자 3명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에 대해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한 것이다. 칸 검사장은 ‘서방 우방국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ICC 내 암묵적 규칙을 깼다. 되레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네타냐후 총리와 그를 옹호하는 우방국에 정면 도전했다.

칸 검사장은 1970년 파키스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소수 분파인 아흐마디야 이민자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아흐마디야는 이단 취급을 받으며 파키스탄에서 탄압받은 분파이다. 칸 검사장은 과거 외신 인터뷰에서 “박해받는 공동체에 속하며 겪은 경험으로 인권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칸 검사장은 27년간 전범 사건 수사·변호를 해왔다. 런던 킹스칼리지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변호사, 영국 검찰청 검사 등 경력을 쌓고 1997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검사로 부임했다. 이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캄보디아·레바논 특별재판소 등에서 일해왔다. ‘유엔 이라크 내 이슬람국가(IS) 전쟁범죄 조사단’(UNITAD) 조사단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과거 전범 혐의 피의자를 변호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과 윌리엄 루토 전 케냐 대통령, 리비아 최고지도자였던 고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등을 변호했다.

이에 대해 과거 칸 검사장은 “변호인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거나, 검사가 ‘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등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호했다고 미국 온라인매체 오피니언주리스에 해명했다.

칸 검사장이 9년 임기의 ICC 검사장으로 선출된 건 2021년이다. 수개월간 의견 교착으로 검사장이 선출되지 못하던 상황에서 칸은 유럽국의 적극적 지지로 검사장에 선출됐다.

ICC는 국경을 넘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려는 취지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에 근거해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ICC 재판부와 검찰은 서방 우방국 지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나 수사는 회피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ICC의 한 고위 관료는 부임한 칸 검사장에게 “이 법정은 아프리카와 푸틴 같은 깡패들을 위해 세워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 검사장은 하마스와 이스라엘 지도부 양측에 선전포고했다. 그는 지난 20일 보도자료를 직접 내고 야히야 신와르와 무함마드 데이프, 이스마일 하니예 등 하마스 지도부에 대해 살인, 성폭력 등 8개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장관에게는 전쟁범죄 등 7개 혐의로 체포 영장을 청구했다. ICC 검찰이 영장 청구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자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체포영장을 청구한 칸 검사장을 향해 박수를 보냈던 미국과 영국은 돌변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영장 청구에 대해 “터무니없다”며 비난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ICC 검찰의 이번 결정이 “전쟁을 멈추거나, 인질을 구출해오거나, 인도주의적 지원을 투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칸 검사장은 이스라엘 전쟁범죄 수사와 관련해 일부 서방 국가들의 압박을 받고 있다. 지난달 미 공화당 상원의원 12명은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될 경우 칸 검사장과 그의 가족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서한을 ICC에 보냈다.

캐서린 게구트 노팅엄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는 더컨버세이션에 “ICC는 구조적 불의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지도자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고, 절차가 번거롭다는 등 이유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다”며 “고위급 가해자에 한해선 효력이 약한 기소를 하며 비난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가자지구 범죄에 대한 기소는 윤리적 문제를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과 동맹을 사용하는 지도자들에게 ‘권력 정치’가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줄 것이다”고 했다.

가자전쟁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ICC 검찰이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ICC 비가입국인 이스라엘은 ICC가 자국 지도자를 수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ICC는 가자전쟁 인권침해가 ICC에 가입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이들이 기소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네타냐후 총리의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선 그가 고의로 살인을 했는지 입증해야 한다.

칸 검사장은 체포영장을 청구한 뒤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마녀사냥이나 감정적 대응이 아니다. 독립적인 검찰이자 재판부로서 (세계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법적 절차일 뿐”이라며 “이스라엘이 인질을 데려올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게 당연하지만, 그런 행위는 반드시 국제법을 준수하면서 해야 한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불편부당한 수사를 하겠다고 공표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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