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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회장님 꼼수’ 방어하던 변호사 “지배주주 일가 지분 늘리려 낮은 주가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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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천준범 와이즈포레스트 대표가 20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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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 대한 시장의 실망감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시장에서 기대하는 강도 높은 정책들을 계속 펼쳐나가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한국 증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할 가장 묵직한 ‘한 방’은 뭘까.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아셈타워에서 천준범 와이즈포레스트 대표(변호사)에게 물어봤다. 천 대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변신해 대형 로펌에서 이른바 ‘회장님’(지배주주 일가)을 변론하는 일을 했다. 지배주주 일가를 위한 부당 지원 사건 등에서 대주주가 번번이 승소하는 비결을 틈틈이 메모했다가 2020년 ‘법은 어떻게 부자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을 펴냈다.



최근엔 기업의 지배구조(의사 결정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을 맡아 후속 책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가 온다’를 썼다. 회장님 ‘꼼수’를 가장 잘 아는 수비수가 이번엔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로 돌아온 셈이다.



“한국 증시만 왜 이 모양인가요?” 기자가 묻자 천 대표는 국내 기업 구조를 콕 짚었다. 그는 “창업자 가족 중심의 지배주주는 지분율 확대를 위해 주가가 싼 게 좋고, 일반 주주는 주가가 오르면 좋다”며 “이해관계가 완전히 반대인데 지배주주 마음을 누르고 주가가 오르게 하는 제도가 없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국 상법, 한국에 맞지 않는 옷





천 대표는 한국의 상법을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격’이라고 말했다. 우리 상법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미국의 제도를 따온 일본 상법을 그대로 가져왔다. 미국 기업들은 대부분 특정 지배 주주가 없고 다수의 기관 투자가들이 지분을 잘게 나눠 보유한 게 특징이다. 애당초 기업의 이사진들이 지배 주주를 위한 의사 결정을 하거나 지배 주주가 회사의 이익을 독식할 가능성이 없는 셈이다.



한국은 다르다. 최대 주주 지분율이 평균적으로 20∼50%에 이른다. 그런데도 사정이 영 딴판인 미국 법을 가져온 탓에 대주주 견제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천 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업 거버넌스 원칙’은 소수주주에 대한 지배주주의 권한 악용 행위를 방지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며 “독일의 경우 회사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사익 추구를 막기 위해 공정거래법·상법·세법 등을 손봐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봐 왔다고 천 대표는 말한다. “바탕색을 칠하지 않은 채 땜질처럼 규제를 만들어 제도의 공백이 너무 많습니다.”





이사는 회사를 넘어 주주의 이익에 봉사해야





바탕색이 될 수 있는 건 “기업 이사회에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부여”하기 위한 상법 개정이라고 그는 콕 짚었다. 지배 주주 일가만 좋고 다른 주주들에겐 손해를 끼치는 이해 상충 상황이 벌어졌을 때, 모든 주주를 똑같이 대우하도록 법에 명시하자는 얘기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최근 개인의견을 전제로 “무조건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가 내놓는 증시 부양책의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이런 내용이 빠져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우리 밸류업 정책의 원조 격인 일본은 지난 2015년 상장 규정(기업 거버넌스 코드)에 이사회의 ‘수탁자 책임’을 명확히 강조했다. 주주들의 돈을 맡은 기업 이사진이 주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권리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거다.



천 대표는 “우리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도 이사회를 ‘감독 주체’로 뒀다는 점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이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현재는 특정 기업의 이사 전원을 지배주주가 사실상 모두 선임하는 탓에 ‘거수기’라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이사 1명마다 개별 주주 투표를 거쳐 선임 여부를 결정하는 현행 방식 대신, 초등학교 반장 선거처럼 이사 후보들을 모두 줄 세워놓고 한꺼번에 투표해 득표율이 높은 순으로 이사를 뽑는 ‘다득표’를 도입하자는 게 그의 제안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대주주 아닌 일반 주주를 대변할 이사를 이사회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천준범 와이즈포레스트 대표가 20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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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경영권 방어 장치는?





천 대표에게 작심하고 딴지를 걸었다. “아무나 이사가 되면 회사는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천 대표는 기자의 질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건 주주들이 결정할 문제 아닌가요?”



재계에선 일반 주주 보호만큼이나 회장의 경영권 보호 장치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 대표는 “최고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주가를 높이는 것”이라며 “이거 기사 제목으로 뽑아주세요”라고 했다. 밸류업 정책과 상법 개정, 다득표 도입 등이 약발을 발휘해 기업 주가가 훌쩍 오르면 경영권 공격을 하는 기관의 예상 지분 매각 차익이 쪼그라들어 경영권 공격에 나설 유인이 작아진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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