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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이산가족과 수백 번 부른 ‘잃어버린 30년’… “이제는 세대 이어주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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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52] 가수 설운도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2020년 2월 TV조선 ‘미스터트롯’ 준결승 참가자 이찬원(27)이 택한 노래는 설운도(66·본명 이영춘)의 ‘잃어버린 30년’이었다. 1983년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1000번도 넘게 나왔던 노래. 6·25 이후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살아온 이들의 애끓는 마음을 대변한 이 노래는 이제 세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월 ‘미스트롯3′에 출연한 배아현(28)도 이 노래를 택했다.

“제가 스물다섯에 불렀던 노래가 한 세대를 지나 다시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세대를 이어주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입니다.” 최근 만난 설운도는 “우리네 삶을 오선지에 그려 넣은 것이 바로 트로트”라면서 노래와 떼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보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네스북 최단 기간 히트곡 등재 ‘잃어버린 30년’

1982년 KBS ‘신인탄생’으로 데뷔한 설운도는 이듬해 이산가족 방송에 고정 출연하며 전국구 스타가 됐다. 생계를 위해 10대 시절 부산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설운도가 자신의 노래 ‘아버님께’(1982)를 개사해 방송국에 보냈는데, 당시 이원홍 KBS 사장이 녹음본을 들어보고는 곧바로 방송을 결정했다. 첫 방송이 나가고 반나절 만에 전국민이 따라 부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한국 기네스북에 ‘최단 기간 히트곡’으로 기록됐다. 설운도 인생의 전기(轉機)가 이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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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도의 곡 '잃어버린 30년'이 실린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념앨범 표지.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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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동안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며 설운도는 이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다.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며 설운도 자신도 가족들을 다시 상봉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던 어머니와 6남매는 이 노래의 성공으로 다시 한 집에 모일 수 있었다.

두 눈으로 세상 보라” 교훈 준 신상옥 감독의 이안카메라

‘잃어버린 30년’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지난 1993년, 영화감독 고(故) 신상옥(1926~2006)을 만났다. 1978년 납북됐다가 1986년 극적으로 탈출한 신 감독은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 이북(함경북도 부령군) 출신이어서인지, 제 노래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대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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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이 설운도에게 선물한 마미야 C33 카메라.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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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감독은 “좋은 노래 만들어줘 고맙다”며 직접 사용하던 카메라(일본 마미야 C33 프로페셔널)를 선물했다. 두 개의 렌즈로 촬영하는 이른바 이안반사식 카메라(twin-lens reflex camera)였다. “감독님은 생전에 ‘모험적인 좌익도 싫고, 모럴 없는 우익도 싫다’고 하셨지요. 치우치지 말고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씀 같았어요.”

그즈음 설운도의 노래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통에만 갇히지 말고, 여러 장르를 접목해 전 세계가 같이 즐길 수 있게 하자고 마음 먹었지요.” 차차차·삼바·펑키 등 경쾌한 장르와 접목한 ‘설운도식 트로트’ 장르가 만들어졌다.

아내 작사 남편 작곡… 아내가 쓴 노래로 받은 첫 트로피

설운도가 발표한 400여 곡 중 직접 작곡하고 부른 노래는 200여 곡에 달한다. 그중 80%를 아내 이수진(63)씨가 가사를 썼다. ‘여자여자여자’(1992), ‘쌈바의 여인’(1995), ‘사랑의 트위스트’(1997), ‘누이’(1999), ‘갈매기 사랑’(2002) 등이 모두 아내가 가사를 쓰고, 그가 곡을 붙인 히트곡 리스트. “제가 아내에게 소홀했다거나, 서운하게 했을 때 특히 진심 어린 가사가 쏟아져 나오더군요(웃음). 아내는 저를 단련시켜 주는 회초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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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이수진이 작사하고 설운도가 작곡한 '혼자이고 싶어요'(1990)로 MBC 10대 가수 상을 받은 뒤 이듬해 '다함께 차차차(김병걸 작사 이호섭 작곡)'와 역시 아내가 작사한 '여자여자여자'(1992)가 연속으로 히트하며 1992년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이후 설운도는 2010년까지 한해도 빠지 빠지지 않고 연말 가요제 시상식에 이름을 올렸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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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만난 때는 가수로 한참 인기를 얻고 있던 1987년. 어느 드라마 종방연에서 커다란 눈매에 서구적 외모를 가진 여성을 발견했다. 미국서 모델과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한국에 들어와 다수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라고 했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던 그녀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설운도는 “결혼하자”고 했다.

아내가 작사가가 된 건 부부 싸움 덕분이었다. 서로 험한 말을 주고받는 대신 종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잔뜩 써서 건네곤 했는데, 불평불만을 잔뜩 털어놓고도 늘 해피엔딩이었다. 설운도는 아내가 처음 가사를 쓴 노래 ‘혼자이고 싶어요’(1990)로 MBC 연말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그 트로피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뒤늦은 신혼여행길에 그 소식을 듣고, 둘 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평생 잘 살라’는 인장(印章)같이 느껴졌습니다.”

히트곡 제조기 통기타

2018년 친구에게 선물받은 통기타는 요즘 가장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다. 유명 브랜드도 아니고 값이 비싼 것도 아닌데 이 기타만 잡으면 멜로디가 불쑥불쑥 떠올랐다. 미스터트롯 진 출신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2021)가 바로 이 기타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혼자 연주를 하다 아내를 문득 봤는데 세상에나! ‘빠마(파마)’가 다 풀린 산발에, 몸뻬 같은 옷을 입고 턱 하니 소파에 앉아있는데, 진짜 무섭더라니까.” 그런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신비감이 사라진다는 건 곧 가족이 됐다는 거잖아요. 무섭다는 느낌은 내 곁을 떠날까 봐, 더 소중해지는 느낌이죠.”

노랫말은 아내에 대한 연서(戀書)였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얼마나 내게 필요한 사람인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임영웅의 2022년 정규 앨범 수록곡 ‘사랑해요 그대를’도 이 기타로 작곡했다.

설운도는 가수가 된 이후 술·담배 일절 하지 않고 하루에 보통 20㎞를 걸으며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고 했다. ‘잃어버린 30년’처럼 세대를 이어주는 노래를 세상에 더 많이 내놓는 게 꿈이다. “아무리 노래 잘하는 가수라도 히트곡이 없으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또 30년이 지나 다음 세대가 제가 만든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노래 만들기를 멈출 수 없죠.” 그는 그렇게 기타를 다시 잡았다. 또 얼마나 많은 보물이 그 끝에서 탄생할지 궁금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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