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눈치보다가 독박 쓰겠네”…러시아 금융제재에 ‘유럽 단일대오’ 흔들

러, 이탈리아·독일 은행 대상
자산 총 1조1050억 압류

미국정책 동조하는 ECB가
사업 철수 압박하자 ‘맞불’

유럽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발(發) 대규모 금융제재에 직면했다. 미국 눈치를 보면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다가 당한 ‘반격’이라 유럽 내부는 혼란이 불가피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대러 제재 ‘단일대오’에 일부 분열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7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재법원이 전날인 16일 이탈리아 은행 우니크레디트의 증권, 부동산, 계좌 등 러시아 현지 자산 4억6270만유로(6817억원)를 압류했다고 보도했다. 법원은 우니크레디트의 러시아 자회사인 우니크레디트 리싱과 우니크레디트 가란트의 지분 100%에 대해서도 압류 명령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도이체방크 [로이터 = 연합뉴스]

법원은 같은 날 독일 도이체방크의 자산과 도이체방크의 자회사인 도이체방크 기술센터 지분 등 2억3860만유로(3515억원)도 동결하라고 명령했다. 독일 코메르츠방크에 대해서도 증권, 계좌, 모스크바 내 건물 등 부동산 총 9368만8000유로(1380억원) 규모의 자산을 압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총 압류 명령 규모는 약 7억5000만유로(1조1050억원)에 달한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이 50% 지분을 소유한 자회사 ‘RCA’가 이들 은행에 제기한 소송에서 승리한 데 따른 결과다. RCA는 독일의 산업용 가스회사 ‘린데’와 함께 발트해 연안 우스틀루가 항구에 건설하던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 건설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중단됐을 때, 앞서 보증을 제공했던 은행들이 프로젝트 중단에도 불구하고 보증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며 소를 제기했다.

당장 러시아에서 은행들의 자산은 압류될 수밖에 없지만, 향후 법적 다툼의 여지는 남아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보증 계약서는 분쟁이 발생할 경우 영국 법에 따라서 프랑스 파리 중재법원에서 이를 다룬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 영국 대법원은 지난달 RCA에 러시아에서의 소송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은행들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재법원에 관할권 항변을 했지만, 법원은 이를 거부하고 심리를 진행했다. 국제법 차원에서 효력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은행들은 신중론을 취하고 있다. 우니크레디트는 성명을 통해 “자회사 전체가 아니라 러시아 사업부의 자산 일부에만 영향을 미친다”며 “나머지 세부 사항은 현재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방크는 “러시아 법원의 결정에 대한 이행 상황을 보고 러시아 영업에의 즉각적인 영향에 대해 평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럽의 ‘대러 제재 방정식’은 복잡하게 됐다. 러시아가 유럽의 은행들에 이 정도의 대규모 직접 제재를 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 배경이 미국 눈치를 본 유럽중앙은행(ECB)의 ‘지령’ 때문이라서다.

유럽 중앙은행(ECB) [EPA = 연합뉴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ECB가 최근 몇 주 동안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20개국) 은행들에게 서한을 보내 러시아 철수와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했다고 17일 보도했다. ECB는 서한에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를 언급하고 “러시아를 지원하는 유럽 기관들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요청 배경을 설명했다. FT는 ECB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이 유럽의 금융기관들을 제재하기 시작하면 유럽의 은행 시스템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이번 압류 결정은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외국은행들의 자산을 동결해 ‘탈출’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러시아의 ‘맞불’이라는 평가다. 실제 이번에 가장 많은 자산을 러시아 법원으로부터 압류당한 우니크레디트는 당장 6월 1일까지 ECB에 사업 철수 계획 관련 상세 내역을 제출해야 했다.

향후 미국 주도의 대러 제재를 둘러싸고 유럽 내에서 잡음이 커질 염려도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에 자회사를 둔 은행에 자문을 주는 금융계 인사는 “미국 개입에 대한 ECB의 대응은 유럽의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을 보여준다”며 “ECB는 유럽 기업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 지도자가 아닌 추종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FT는 이탈리아 외무부가 지난 13일 우니크레디트에 대한 러시아의 압류 계획 관련 영향 평가, 대응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안드레아 오르첼 우니크레디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러시아에서 철수할 의향이 있다면서도 30억 유로(4조4200억원)에 달하는 사업을 ‘공짜’로 러시아 금융기관에 내주는 행위는 서방의 대러 제재 취지와 오히려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 사업에서 계속해서 ‘위험’을 제거하고 있다”면서도 “러시아에서의 완전한 철수는 매우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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