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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전형민의 와인프릭] "이대로는 쓴맛 본다"… 와인업계는 지금 기후와 전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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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포커스 ◆

매일경제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크루즈산맥 정상 부근에 있는 리지 와이너리의 올드바인(늙은 포도나무)들. 그 너머로 새너제이(San Jose) 시내와 샌프란시스코만이 보인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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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The era of global warming has ended)." 지난해 7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뉴욕 유엔본부에서 지구온난화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제, 지구가 끓어오르는 시대가 왔다(Now, the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은 유럽연합(EU)과 세계기상기구(WMO)가 발표한 데이터에 기반한 것입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7월 지구 기온은 인류가 측정을 시작한 이후 쓰인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합니다. '이제는 정말 위험해!'라는 절박한 호소인 셈입니다.

기후와 환경의 변화는 당연하게도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 인류의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변화를 야기합니다. 당장 매년 역대급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여름과 겨울의 극단적인 온도차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기후변화가 단순히 덥고 춥고를 넘어서 해충 유발, 농작물, 수산물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주변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농업, 그중에서도 특히 환경에 민감한 와인 산업의 변화가 극심합니다. 와인의 기본 재료가 되는 포도는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특성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양조학에서는 아예 이런 기후·환경적 특성을 테루아르(terroir)라고 별도의 용어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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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티 와이너리에서 운용하는 모나크트랙터. AI 기술을 도입한 전기트랙터다. 전자동으로 운전자 없이 쉬지 않고 일한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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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보니 전 세계 와인 단체와 와이너리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앞다퉈 연구하고 있습니다. 화학비료 사용 이전의 재배 방식을 신봉해 과거로 회귀하는가 하면, 아예 최첨단 신기술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최근 여러 산업에서 유행하는 지속가능성(sustainable)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 해안에서 천혜의 자연환경을 무기 삼아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발돋움한 캘리포니아가 이 시대적 흐름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직접 캘리포니아와인협회(CWI)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 일대 와이너리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지속가능한 와인 산업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지속가능성의 핵심 중 하나는 현재 가용 가능한 자원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자는 전략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로 가뭄이 연이어 닥치면서 물 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심한 가뭄은 물의 사용이 중요한 와인 산업에 치명타였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은 앞다퉈 물에너지 순환 시스템 구축에 나서고 있습니다. 로다이(Lodi)에 위치한 랭트윈스(LangeTwins) 와이너리는 용지 내에 자체 저수용 연못들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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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양조 후 남은 찌꺼기 등 부산물을 지렁이를 배양하는 데 활용해 양토로 전환하는 랭트윈스(LangeTwins) 와이너리.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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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통해 빗물 혹은 이미 한 번 사용된 물을 모으고 정화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 개를 만들어 물의 오염 정도에 따라 등급을 두어 관리하고, 단계별로 정화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정화한 물은 양조통 세척과 포도나무 관개는 물론 와이너리 시설용수로도 쓰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양조시설 위로는 가림막 같은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했습니다. 해를 가려주는 역할과 동시에 와이너리에 필요한 전기 일부를 직접 생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양조하고 남은 포도 찌꺼기는 지렁이를 키우는 양분이 됩니다. 지렁이는 포도 찌꺼기를 사용가능한 양토이자 거름으로 변환시키고, 와이너리는 이것을 다시 포도밭에 뿌려 새로운 양분으로 활용합니다.

아직 용처를 찾지 못했지만, 양조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을 일단 모아놓기도 합니다. 소노마 카운티 힐즈버그(Healdsburg)에 위치한 실버오크(SilverOak) 와이너리는 양조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CO2)를 포집하고 있습니다. 아직 적절한 활용 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 만큼 자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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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이 지속가능 와인 생산의 일환으로 다양한 용기를 출시하고 있다. 왼쪽부터 캔, 경량화 유리병(기존의 절반 수준), 종이와 PET로 만든 병, 알루미늄 병.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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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파밸리에 위치한 매티아슨(Matthiasson) 와이너리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방법을 시도합니다. 포도밭의 생물 다양성을 과거와 같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1999년 일찌감치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의 지속가능한 행동 교범(California manual on sustainable vineyard practices)을 작성했던 스티브 매티아슨이 오너인데, 그는 자신들의 활동을 재생 농업(Regenerative farm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대 산업혁명 이후 지력을 돋우기 위해 당연하게 쓰여온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몇 년간 뚝심 있게 진행한 그 시도만으로 수년 만에 자생 식물과 좋은 곤충(익충)이 포도밭에 돌아오는 효과를 얻었고, 이 작은 변화가 자연의 선순환에 연쇄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토착 자생 지피 식물들이 늘어나면서 그늘 역할을 해 토양 겉이 마르는 것을 늦춰줬고, 토양의 습도 유지가 용이해졌습니다. 관개에 쓰이는 물의 사용량이 줄어든 겁니다. 이뿐만 아니라 포도밭의 생물 다양성도 늘어났습니다. 덕분에 포도나무의 면역 체계에 적당한 자극(질병 압력)이 주어졌고, 포도나무가 병충해에 더 강해지는 효과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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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배된 포도로 만든 와인 역시 다른 와이너리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캐릭터를 가집니다. 당도는 조금 낮지만 훨씬 농익고 튼튼한 포도를 얻게 되면서 기존 내파밸리 스타일과는 다른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아로마를 가진 와인이 탄생한 겁니다. 현재 매티아슨 와인은 독특한 캐릭터 덕분에 전 세계에서 애호가들이 찾는 고급 와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재밌는 것은, 비료를 쓰지 않는 재생 농업을 시행한 이후 오히려 포도 생산량이 늘었다는 점입니다. 당장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는 게 농사의 수고를 덜고 단기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자연 순환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재생 농업이 훨씬 낫다는 설명입니다.

리버모어의 웬티(Wente) 와이너리에서는 최첨단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농사에 필수적인 트랙터를 모나크트랙터(Monarch tractor)라고 불리는 전기트랙터로 교체한 겁니다.

모나크트랙터는 전기로 구동되고, GPS와 AI 기술이 도입돼 운전자 없이 24시간 내내 포도밭을 누비면서 활동합니다. 기존 내연기관(경유) 트랙터에 비해 약 3배 정도 비싸지만, 운전하는 인력이 필요하지 않고 유류대 등 고정 유지비가 적게 들어 비용면에서 차라리 효율적입니다.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와인병의 무게를 줄이는 시도는 이미 캘리포니아에서 흔합니다. 한때 두껍고 무거운 병이 고급 와인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경량화가 추세가 됐습니다. 아예 일부 와이너리는 지난 2월부터 실험적으로 종이와 PET 소재를 활용한 와인병을 출시했습니다. 더 저렴하고 깨질 염려도 적은데,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밝혀졌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소비자의 '인식'이죠.

이들의 지속가능성 고민은 에너지와 유기농, 탄소배출 등 문제에 그치지 않고 노동(labor) 문제까지 파고듭니다. 많은 부분을 기계화·자동화하더라도, 와인이 양조되기까지 포도 재배부터 공장 운영의 일 대부분이 여전히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럽 핵심 산지의 일부 와이너리는 고품질을 위해 기계 사용을 일절 배제하고 숙련된 노동력만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상당수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은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노동력 수급을 위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러시안 리버밸리 인근 더튼랜치(Dutten ranch) 와이너리가 대표적입니다.

와이너리는 용지 내에 미국 서민들이 사는 수준의 주택을 짓고, 외국인 노동자들(대부분 멕시코인)에게 무상으로 이를 대여합니다. 미 연방법에 맞춰 만들어진 특별 프로그램에 따라 와이너리가 노동자를 직접 보증하고 초청하는 방식입니다. 노동자들의 시급은 19달러(약 2만6000원), 1년 중 10개월(2개월은 휴가)을 주 5일 40시간(최대 52시간) 근무합니다.

연방 정부와의 협업을 통한 프로그램 개발은 와이너리와 노동자 양측에 윈윈 전략이 됐습니다. 와이너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좀 더 우수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노동자는 생활이 안정되는 것은 물론 신분을 보장받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입니다. 실제로 만나본 더튼랜치 와이너리 노동자들은 대를 이어 와이너리에서 일을 할 정도로 직업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노력들이 '가진 자의 돈 놀음'으로 보이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위에 언급한 많은 사례가 상당한 초기 자본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가성비와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속 빈 강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 시장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게 정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캘리포니아 와인 품질에 대한 와인 업계의 인식이 지금 이 순간에도 좋아지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지속가능성을 인증한 캘리포니아 와인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단지 가성비만을 따져서 지속가능한 생산을 외면하기엔 지속가능성과 환경이라는 화두가 이미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트렌드가 됐습니다. 부담스러운 초기 자본에 비해 장기로 갈수록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는 점도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이 지속가능성에 앞장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지속가능성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정에서 만난 한 와인 양조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게 바로 지속가능성이야." 아직도 아리송하다면, 이 분야를 초기부터 연구해온 스티브 매티아슨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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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밌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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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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