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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이별못하는사회]①"연인과 헤어지는데 목숨 걸어야 하나"…'안전 이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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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교제 폭력 신고 7만7150건

4년 전보다 57% 늘어…교제 살인도 138명

전문가들 "통제성이 교제 살인 전조"

편집자주하루 평균 1.23명. 지난해 연인 관계인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하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여성의 숫자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은 연인에게 삶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끊이지 않는 교제 폭력을 두고 전문가들은 상대방에 대한 '통제 욕구'라는 전조 증상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시아경제는 총 2회에 걸쳐 폭력으로 자각하기 어려운 교제 폭력 피해 사례와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법적 대안을 살펴본다.
"전화를 한번에 바로 받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어요. 회식하는 날엔 정해진 귀가 시간을 꼭 지켜야 했고요."
-한국여성의전화 상담 사례 中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이별을 통보한 여성이 연인에게 살해된 사건 이후 '교제 살인' 문제가 재조명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교제 살인이 연인 간 사소한 통제 행위에서부터 시작되는 탓에 많은 여성이 전문기관 등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이를 방치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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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가들 "통제성이 살해 전조 증상"
13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교제 폭력으로 신고된 건수는 7만7150건으로 4년 전인 2020년(4만9225건)과 비교해 57%가량 늘었다. 올해 1~3월 집계된 신고도 1만9098건에 달했다.

교제 살인에 관한 정부의 공식 통계는 현재 집계되지 않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기반으로 발표한 자체 보고서를 살펴보면 지난해 친밀한 관계(동거·소개팅·채팅·조건만남 등)에서 살인 또는 살인 미수를 입은 여성은 모두 449명이었다. 이 가운데 138명이 살해된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진 피해자만 이 정도"라며 "언론 보도로 드러나지 않은 이들까지 합치면 실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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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피해 여성을 상담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은 교제 살인의 전조 증상으로 상대방에 대한 강한 '통제 욕구'를 꼽는다. 통제성이 강한 이들일수록 상대방이 본인 통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을 참지 못하는데, 통제성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인 이별 통보에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결국 살인 행위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소장은 "통제 행위는 휴대폰 검사, 귀가 시간 점검 등 연인 간 다양한 언행과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 3월 경기 화성시에서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중상을 입힌 김레아(26)는 평소 연인의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고 연락 상대를 검열하는 등 상대방을 통제했다. 최근 강남역 인근에서 연인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해 범죄심리 전문가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가해자인 의대생을 두고 "일반 남성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강한 통제 욕구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통제성이 강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본인이 통제 가능한 영역을 떠나는 행위를 견디지 못한다"며 "상대방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성이 가장 약화할 때가 바로 이별할 때다. 상대방의 이별 통보에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대신 헤어져 드립니다"…사설 기관으로 간다
교제 살해는 연인 간 다양한 통제 행위에서부터 비롯되지만, 많은 피해 여성이 신고하거나 상담 센터에 방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직접적으로 다치고 멍들게 하는 폭력은 아닌 탓에 교제 폭력에 해당하는지 인지조차 못 하고, 오히려 보살핌과 애정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한 여성폭력 상담센터 관계자는 "한 피해 여성은 본인이 이러이러한 상황에 부닥쳐있는데, 남자친구가 하는 행동이 괜찮은 것인지 묻기도 했다"며 "폭력을 당했음에도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거'라는 남자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참다가 결국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거나 혹은 주변 친구나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하러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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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살인)를 받는 20대 의대생이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사 기관이나 전문 상담 센터 대신 '안전 이별'을 찾아 사설 기관 힘을 빌리려는 이도 늘었다. 오랜시간 상대의 집착과 통제 속에서 고통받다가 이별 대행업체 등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인터넷 주요 포털사이트와 커뮤니티를 보면 '200만원 빌려줄래? 안전 이별법' '안전 이별을 위한 가이드라인'과 같은 게시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포털에 노출되는 몇몇 이별 대행업체는 '상대방 남자분과의 상담을 통해 이별을 받아들이고 포기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린다'며 광고하고 있다. 이들 업체가 제시한 가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약 5만~15만원 선이다. 한 이별 대행 업체 관계자는 "불경기이다 보니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 자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상담 건수는 최근 확실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연인 간 통제 행위가 정서적 폭력에 해당한다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허 입법조사관은 "'너 그 사람들 만나는 거 싫어' '그 옷 입지 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폭력에 해당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며 "진짜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배하고 있으면 물리적 폭력은 사실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말 한마디로 피해자를 떨게 만드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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